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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발상] 천문기구 둘러싼 中과의 마찰?···세종은 되레 사대 극진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너희는 명의 신하냐, 조선의 신하냐?”

[유성운의 역발상]

조선의 발명가 장영실과 세종의 꿈과 우정을 다룬 영화 ‘천문-하늘에 묻는다’에는 세종과 신료들의 갈등이 적잖게 등장합니다.
조선만의 독자적 천문과 시간을 갖겠다는 세종의 구상에 신하들은 “명나라에서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며 사사건건 반대합니다. 결국 이들은 명나라 사신이 보는 앞에서 장영실이 만든 천문기구 간의(簡儀)를 불태우게 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합니다.

이 비극적 서사를 보며 관객들은 가슴을 치게 되지만 한 가지 위로랄까요. 이같은 설정은 실제 역사와는 다릅니다. 신하들이 조선의 천문기구에 이를 갈고, 명나라에 대등한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세종을 방해했다는 건 허구라는 것이죠.
결론부터 말하면 세종은 어느 국왕보다 중국에 대한 사대의 예를 극진히 챙겼던 군주입니다. 신하들로부터 지적을 받았을 정도니까요.

간의대를 철거하라는 세종, 말리는 신하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한 장면.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한 장면.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좌헌납 윤사윤이 아뢰기를 ‘이미 이룩된 간의대(簡儀臺)를 헐어 버리고 급하지 않은 이궁(離宮)을 지으심은 진실로 옳지 못하옵니다. 미비한 신의 말씀을 굽어 용서하셔서 우선 이 공사를 정지하시기를 비옵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계획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고칠 수 없다’…” (『세종실록』 25년 1월 23일)

간의대는 간의를 설치한 곳입니다. 세종은 왜 소중히 여기던 간의대를 헐어버리라고 했을까요. 20일 전 세종의 발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간의대는 자손 만대에 전하기를 기약했던 것인데, 이제 갑자기 헐어 버리려 하니 마음이 심히 괴롭다. 그러나 임금이 아들에게 자리를 전해 주고서 아들 임금과 더불어 같은 궁에 함께 거처하는 것은 불가하다.”(『세종실록』 25년 1월 3일)

세자(문종)에게 양위를 생각한 세종은 자신이 머무를 궁을 따로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이를 위해 간의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이궁을 지으라고 한 것이죠.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흥미로운 것은 세종의 이 구상에 많은 신료가 반대했는데,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사헌부의 발언입니다.

“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간의대는 전하께옵서 하늘을 공경하시고 백성의 일에 힘쓰시는 처소로서 경솔하게 헐어 버림은 불가하온데, 이제 그것을 헐고 따로 새 궁을 세우는 것은 신들은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습니다’”(『세종실록』 25년 2월 15일)

영화 ‘천문-하늘에 묻는다’에서 세종이 독자적인 천문기구(간의)를 만든다고 했을 때 가장 반대하는 신하는 대사헌 정남손입니다. 대사헌은 사헌부의 수장이죠. 하지만 정작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사헌부에서 간의대 철거를 강력하게 막아서고 있습니다. 영화와 실제 역사는 정반대인 셈이죠.
물론 이때 세종이 간의대를 없앤 것은 아닙니다. 장소를 옮긴 것이죠. 하지만 이궁을 짓기 위해 반대를 무릅쓰고 기존 간의대를 헐어버린 것은 영화 속 세종의 ‘문화 군주’의 이미지와는 사뭇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사대부들은 천문기구를 싫어했을까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한 장면.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한 장면.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조선 사대부들이 명나라를 의식해 간의를 꺼렸다는 영화의 설정도 현실과는 다릅니다. 반대로 천문기구 제작을 환영했습니다.
“옛 성인이 반드시 정치하는 도의 첫째 일로 삼았으니, 요의 역상(曆象·역법)과 순의 선기(璇璣·천체 관측)가 이것이다. 우리 전하께서 제작하신 아름다운 뜻은 곧 요·순과 더불어 법을 같이 하였으니…”  (『 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세종의 천문기구 제작을 중국의 전설적인 성인 요·순의 치적에 비교하며 평가하는 대목입니다. 명나라와 관계를 끊는 독자적 행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성상(세종)께서 정인지에게 이르기를, ‘우리 동방이 멀리 바다 밖에 있어서 무릇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에 따랐으나, 홀로 하늘을 관찰하는 그릇에 빠짐이 있으니 고전을 강구하고 의표를 참작해 만들어서 측험(測驗)하는 일을 갖추게 하라’” (『 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세종의 발언은 조선이 중화의 문물을 잘 흡수했지만 유독 천문학에선 미흡하니 과거 중국의 방식 등을 연구해 정확한 천문 관측을 시행하라는 것입니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한 장면.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한 장면.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식이 한층 강해진 중종 시대에도 당대의 대표적 사대부인 성세창은 이렇게 건의합니다.
“세종 시대는 치도(治道)가 지극히 갖추어졌는데, 간의대 같은 것을 세운 까닭은 하늘을 공경하고 재앙을 삼가는 도리가 지극히 크고도 급하기 때문이었으니 이제 대신(大臣)을 가려서 특별히 가르쳐야 합니다.” (『중종실록』 12년 11월 25일)
성세창은 사간원, 홍문관, 사헌부 등 요직을 거친 엘리트였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인물입니다. 누구보다 사대에 충실한 인물조차도 간의대를 중히 여기고 제대로 이용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반면 영화는 “장영실 등을 불경죄로 다스렸다(『세종실록』24년 5월 3일)”는 기록 이후 역사에서 사라진 장영실에 대해 상상력으로 풀어갑니다. 또 영웅이 겪는 고난이라는 서사를 만들기 위해 신료들과 명나라 사신이라는 ‘빌런’을 등장시키고, 세종과 장영실의 브로맨스를 적절히 녹였습니다.

“내가 사대를 지나치게 한다지만…”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사실 역사에 기록된 세종은 그 누구보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 관계에 애를 쓴 군주였습니다.
이것을 반영하는 데이터가 있습니다. 진하(進賀·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벼슬아치들이 조정에 모여 임금에게 축하를 올리던 일) 관련 기록입니다.
계승범 서강대 교수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세종 시기의 진하 관련 기록은 명나라에 대한 것이 전체의 89%를 차지합니다. 반면 국내 이슈로 진하를 논의한 것은 11%에 불과합니다. 명나라에서 일어난 각종 대소사를 극진하게 챙겼던 셈입니다.
반면 태종 시기에 명나라 관련 진하 논의는 57%에 불과합니다. 세종 이후인 문종·단종 시기는 59%, 세조·예종 시기는 21%에 불과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진하' 관련 기사의 국왕별 비교. 세종 시대엔 명나라와 관련해 진하를 논의하는 사례가 많았다. 계승범 『중종의 시대-조선의 유교화와 사림운동』에서 인용.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진하' 관련 기사의 국왕별 비교. 세종 시대엔 명나라와 관련해 진하를 논의하는 사례가 많았다. 계승범 『중종의 시대-조선의 유교화와 사림운동』에서 인용.

심지어 명나라 황제 정통제가 원정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풍문을 듣고 진하사(축하하는 사신)을 보내겠다고 했다가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보류하기도 합니다.
“임금(세종)이 이르기를, ‘황제가 달달놈들에게 승첩하였다 하니, 우리나라에서도 진하(進賀)함이 예의상 옳겠다’고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전해 들은 말로써 축하하는 건 불가하오니, 사신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 (정확한) 소식을 듣고 축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세종실록』 31년 12월 3일)

일부 신하들 사이에선 사대에 대한 예가 과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던 모양입니다. 이를 의식한 세종의 ‘해명’입니다.
“내(세종)가 사대의 예를 지나치게 한다고 말한다는데, 지금 명나라가 사신을 보내오고 상을 주고 하는 예우가 일찍이 없었다. 우리나라는 본래 예의의 나라로서 해마다 직공의 예를 닦아, 때에 따라 조빙하면 명나라가 이를 대우하는 것이 매우 후하였다. 그런데 정성을 다하여 섬기지 않는다면 이것은 크게 불경한 일이고, 특히 신하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그럴 수가 있겠느냐” (『세종실록』 10년 윤4월 18일)

세종은 왜 사대에 정성을 들였나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한 장면.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한 장면.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세종이 이처럼 사대에 공을 들였다는 것을 지금의 시각으로 재단해 비판할 수만은 없습니다.

조선 초기는 왕권이 극도로 불안정했습니다. 제1·2차 왕자의 난, 계유정난, 중종반정 등 건국 후 100년 동안 피바람이 불면서 제대로 왕위가 계승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토록 강조했던 유교적 질서가 자리 잡기란 쉽지 않았고 왕권의 권위도 낮아질 수밖에 없었죠.

이런 배경 속에서 세종은 황제에 대한 정성을 통해 국내에서 신료들의 국왕에 대한 충성을 끌어냈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유교적 가치에 근거한 철저한 군신관계를 확립하려 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천자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서 정통성과 권위를 확립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조선 초기 국왕들이 신료들보다 중국 황제에 대한 예를 갖추는 것에 더욱 적극적이었던 이유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조선이라는 신생 왕조의 안보 및 안정성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현재의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즉, 세종은 명나라에 대항하는 독자 세력을 꿈꾼 것이 아니라 명나라가 주도한 세계질서에 편입돼 안정과 번영을 추구한 것이죠. 실제로 세종 시기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까지 약 150여년간 조선은 외침을 걱정하지 않고 내부 문제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명나라와 갈등은 과학 아닌 영토

세종 시대에 개척한 4군 6진. 하지만 이 지역은 강에 3면이 포위된 지형이기 때문에 방어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4군 지역은 세조 대에 폐지됐다. [중앙포토]

세종 시대에 개척한 4군 6진. 하지만 이 지역은 강에 3면이 포위된 지형이기 때문에 방어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4군 지역은 세조 대에 폐지됐다. [중앙포토]

그렇다면 세종은 명나라에 무조건 양보하고 충성을 다했던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명나라의 뜻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한 것이 있는데 바로 국방입니다.

세종 시대에 압록강 두만강 유역 4군 6진을 개척해 영토를 넓힌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하지만 명나라는 조선이 압록강-두만강 라인까지 영토를 확장하려는 것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명나라는 여진 지도층을 복속시켜 조선을 견제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특히 명나라는 조선과 가까운 여진 세력을 공들여 포섭했습니다. 명나라의 벼슬을 준다든가, 만주 일대 권한을 인정해주는 식이었죠. 태종-세종 시대에도 명나라는 조선과 특수 관계였던 동맹가첩목아라는 여진족 추장에게 입조하라고 수 차례 권유했습니다. 반면 조선은 이를 막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자 영락제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짐이 왜 조선과 영토를 다투겠냐”며 짜증 섞인 추궁을 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세종 시기 만주일대 분포한 여진족 세력. [자료 박정민 『조선 세종대 여진인 통교체제의 정비』

조선 세종 시기 만주일대 분포한 여진족 세력. [자료 박정민 『조선 세종대 여진인 통교체제의 정비』

이런 와중에 세종 15년엔 여진족들이 활동하는 파저강 일대를 정벌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초기 최대 규모의 정벌로 평가받습니다. “조선이 제멋대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은 명나라는 사신을 보내 추궁하기도 하고, ‘서로 침범하지 말라’는 황제의 칙서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과거 명나라가 ‘여진족이 국경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자체적으로 조치하라. 업신여김을 당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며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또. 현장조사를 위해 말을 빌려달라는 명나라 사신의 요구도 ‘황제로부터 그런 사항을 전달받은 바가 없다’며 거절합니다. 민감할 수 있었던 파저강 정벌은 큰 탈 없이 넘어갔습니다. 세종이 차곡차곡 쌓은 사대 외교의 힘은 아니었을까요.

세종이 자화자찬 했듯이 세종 시대는 명나라와의 관계가 매우 좋았습니다. 강대국과의 우호 관계를 확보한 덕분에 조선은 이 시기에 여진족 정벌, 대마도 정벌 등 공격적인 대외 정책을 펴는 등 그 어느 때보다 활동 공간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현재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는 부분입니다.
만약 세종을 명나라로부터 자주적 나라를 건설하려 했던, 혹은 한글을 창제한 문화 군주 등의 이미지로만 묶어 버린다면 연결되지 않는 지점입니다.

조선 세종때의 로켓인 신기전이 1993년 4월 27일 복원되어 발사되고 있다. [중앙포토]

조선 세종때의 로켓인 신기전이 1993년 4월 27일 복원되어 발사되고 있다. [중앙포토]

한 가지 더 짚어 보자면 세종 시대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타나는 명나라에 대한 설정입니다. 조선의 한글 발명도 신기전 개발도 천문기구 사용도 방해하는 악당 같은 거대 세력입니다. 역사적으로 명나라가 조선에 이런저런 부당한 요구를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글이나 천문기구 때문에 명나라의 추궁을 받거나 양국 관계가 악화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 군사 앞에서 조선군이 신기전을 사용할 정도였으니까요. 굳이 세종 시대에 명과 마찰을 빚을 수 있었던 사건을 꼽자면 앞서 언급한 압록강·두만강 일대의 영역 문제였습니다.

물론 사극이 실제 역사와 똑같이 고증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재미를 위해 상상력이 가미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가짜 세종’을 만들어내면서까지 일관되게 사실과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의문이 듭니다. 어느새 우리 역사의 문제를 ‘남 탓’으로 돌리는 시각에 익숙해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온 시대를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역사가 갖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계승범 『중종의 시대-조선은 어떻게 유교 국가가 되었는가』, 지두환 『세종대 동아시아 정치상황』, 이규철 『세종대 대외정벌 정책의 본격화와 대명인식』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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