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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들뜨게 한 제니 린드, 영화 ‘겨울 왕국’ 엘사의 모델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57)

스웨덴의 나이팅게일로 불린 소프라노 제니 린드(1820 ~ 1887)의 순수한 모습. 에두아르트 마그누스 Eduard Magnus 그림. 1862. [사진 Wikimedia Commons]

스웨덴의 나이팅게일로 불린 소프라노 제니 린드(1820 ~ 1887)의 순수한 모습. 에두아르트 마그누스 Eduard Magnus 그림. 1862. [사진 Wikimedia Commons]

상드에게 버림받고 상심한 쇼팽에게 런던도 즐거움을 주지 못했다. 초대한 제인 스털링과 어스킨 부인, 자매의 지극한 친절함에도 그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제인 자매는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 날이면 매일 그를 찾아와 붙어 다녔고 쇼팽은 오히려 두 사람에 의해 갇힌 듯한 느낌마저도 들었다.

그런 쇼팽에게 한 줄기 샘물 같은 신선한 존재가 런던에 있었으니, 바로 청순한 모습의 오페라 가수 제니 린드(1820~1887)였다. 북유럽과 독일을 중심으로 이름을 떨치던 제니는 쇼팽이 런던으로 오기 한 해전 그 곳 무대에 진출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쇼팽은 런던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니가 공연하는 오페라 ‘몽유병여인’을 관람했고 그녀의 매력에 빠졌다.

그 시기 오페라 무대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던 소프라노 가수였던 제니 린드는 스웨덴에서 회계원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혼외자식으로 태어났다. 제니의 출산 후 어머니는 이혼 당했다. 종교적 양심 때문이었는지 어머니는 전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니의 생부와 결혼을 하지 않았고 딸은 14세까지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한 아이로 자랐다.

아홉 살의 외로운 제니가 고양이에게 불러 주던 노래를 유명한 발레리나의 하녀가 우연히 듣게 되었다. 하녀를 통해 놀라운 재능의 소녀를 소개받은 발레리나는 자신이 속해있던 왕립 극장에 제니가 들어가게 해 주었다. 수줍음 타던 소녀는 18세에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에서 주역을 맡아 스웨덴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제니는 20세에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궁정 가수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발성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이 없는 가운데 무리한 성대의 사용은 그녀의 목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그녀가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게 해준 사람은 마누엘 가르시아였다. 그는 앞서 소개된 폴린 비아르도의 오빠로서, 역사상 최초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보컬 트레이너였다. 마누엘에게서 건강하고 안전한 성대사용법을 전수받은 제니는 얼마 후 기량을 되찾았다.

덴마크의 동화작가 크리스찬 한스 안데르센. 그는 제니 린드에게 청혼했다. 1836. 알브레흐트 얀젠. [사진 Wikimedia Commons]

덴마크의 동화작가 크리스찬 한스 안데르센. 그는 제니 린드에게 청혼했다. 1836. 알브레흐트 얀젠. [사진 Wikimedia Commons]

목소리를 찾은 제니는 스웨덴과 가까운 덴마크의 무대에 서게 되는데 이 때 동화작가 안데르센(1805~1875)을 만나 우정을 쌓게 된다. 안데르센은 제니에게 사랑을 느꼈지만 여자 앞에만 서면 소심해지고 부끄러워하는 성격 탓에 고백을 할 수가 없었다. 떠나는 제니를 따라 기차역까지 간 그는 용기를 내서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하지만 말로 할 수 있는 용기는 없어서 청혼의 내용을 담은 편지만 전해주었을 뿐이었다. 오빠 동생으로만 생각했던 제니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녕, 신의 가호가 있어서 오빠를 보살펴주시기를 바라요. 애정 실린 동생의 진실한 바램이에요”하는 편지를 남기고 제니는 독일로 떠났다.

둘은 여생을 통해 여러 번 만났다. 그러나 안데르센의 눈에 제니의 모습은 냉정하게만 보였던지 그의 동화 ‘눈의 여왕(디즈니 만화영화 겨울왕국의 기초가 됨)’에서 얼음 심장을 가진 공주는 제니를 모델로 해서 쓰여졌다고 한다. 안데르센은 제니의 거절이 준 충격 탓인지 동성애에 빠지기도 했다.

베를린에서 제니는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의 주인공역을 맡아 성공을 거두었고 스웨덴의 나이팅게일로 불리며 자신의 명성을 전 유럽으로 확산시켰다. 제니는 그곳에서 멘델스존을 만나게 되는데 둘은 곧 서로에게 강한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제니가 자선 연주회를 본격 시작한 것은 베를린에서였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는 가운데,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혹은 수익금의 대부분을 공익의 목적에 기부하는 제니는 박애주의자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었고 이것은 그녀의 인기를 더욱 높여서 리스토메니아(리스트의 열광적 팬)에 비견되는 ‘린드 메니아’가 형성되었다.

1847년, 런던에 진출했을 때 그녀의 위상은 이미 확고했다. 영국 여왕도 그녀의 무대를 빼놓지 않았다. 그녀의 런던 데뷔 무대는 멘델스존도 지켜보았다. 제니의 성공을 바라며 마음 졸이던 그는 그녀가 실력을 거리낌 없이 풀어놓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런던에 있던 2년간은 오페라 가수로서의 제니 린드의 절정기였다. 초콜릿 상자에 그녀의 얼굴이 새겨졌고 튤립에 그녀의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음식점도 그녀의 이름을 도용해서 생겨났다.

마지막 해의 펠릭스 멘델스존. 1847. 빌헬름 헨젤. [사진 Wikimedia Commons]

마지막 해의 펠릭스 멘델스존. 1847. 빌헬름 헨젤. [사진 Wikimedia Commons]

독일로 돌아간 멘델스존은 그해 11월 세상을 떠났다. 멘델스존은 제니와 협업하여 곡을 여럿 썼는데 그의 오라토리오 엘라이자는 제니를 위한 곡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망에 충격을 받은 제니는 한 동안 그 곡을 부르지 않았다. 이듬해 말에 가서야 제니는 엘라이자를 불렀고 그 공연에서 얻은 큰 수익금을 모두 멘델스존 이름의 장학기금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사람들은 침착하고 순수한 제니의 목소리에 엘라이자의 아리아가 가장 잘 어울렸다고 했다.

쇼팽은 제니의 런던에서의 두 번째 시즌 첫 무대를 관람했다.(1848.5.4) ‘여왕폐하’극장에는 여왕 부부와 왕족들도 와있었다. 파리에서부터 알고 있던 그로트 부인은 마침 제니를 잘 알고 있었다. 쇼팽 얘기를 들은 제니는 부인을 통해 무대 앞의 좋은 좌석 티켓을 보내주었다. 무대 위의 그녀는 청초한 음성과 확신에 찬 태도로 놀라움을 주었다. 둘은 인사를 나누었다. 쇼팽은 제니를 방문했고 그녀도 쇼팽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로트 부인은 자신의 집으로 쇼팽과 제니를 초대했다. 초대손님은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쇼팽과 제니는 저녁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피아노 옆에 같이 앉아있었다. 쇼팽은 그녀가 부르는 스웨덴 노래를 들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친밀한 느낌을 가졌을 거라고 보는데 두 사람이 깊은 관계에 빠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특히 이날의 만남에 주목한다.

쇼팽의 첫 런던 연주회에 제니가 참석했다. 쇼팽은 감격해서 가족에게 이것을 알렸다. “린드 양이 내 공연에 왔어. 이것은 예삿일이 아니야. 그녀는 어딜 가나 주목을 받기 때문이지. 내가 다시 젊어졌으면 좋겠는데.” 1848년 시즌이 끝나고, 제니는 영국 공연 투어에 오르고, 쇼팽은 스코틀랜드로 이동하면서, 둘은 떨어지게 되었다.

프레데릭 쇼팽. 앙리 리망의 원본을 디지털기법으로 보정한 것. [사진 Wikimedia Commons]

프레데릭 쇼팽. 앙리 리망의 원본을 디지털기법으로 보정한 것. [사진 Wikimedia Commons]

1849년 5월, 절정기의 제니는 갑작스럽게 무대 은퇴 선언을 했다. 그러자 그녀의 상품성을 익히 알고 있던 미국의 흥행업자 JT 바넘이 그녀에게 재빨리 접근하였다. 제니는 스웨덴에 무료학교를 건립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바넘은 그것에 필요한 기금마련을 위한 미국 순회공연을 제안하였다. 큰 선금을 주고 그는 제니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제니 린드의 미국 공연은 화제 속에 대 성공을 거두었다. 수완 좋은 바넘은 제니가 도착하기 전부터 미국에 제니 열풍을 일으켰고,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관중을 동원했다. 뉴욕에서는 엄청난 군중을 통제하느라 경찰의 특별 경계가 있었다.

보스턴에서는 연주회장에 입장하지 못한 군중의 폭동을 막기 위해 제니가 건물 부속 탑에 올라가서 노래를 해야 했다. 지금 그 건물은 없어졌지만 탑은 다른 곳으로 옮겨져 제니린드 타워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미국 공연을 통해 바넘과 제니는 모두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제니는 그 수익금을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스웨덴의 공공학교 건립을 위해 사용했다. 바넘과 제니의 이야기는 2017년 상영된 영화 “위대한 쇼맨”에서 다루어졌다. 필자는 바넘과 제니 린드가 사랑에 빠지는 영화 속 설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런던에서 두 시즌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제니는 파리를 방문했다. 그 때는 쇼팽이 스코틀랜드 체류를 마치고 파리로 돌아와 병상에 있을 때였다. 그녀는 약 3주간 쇼팽의 아파트에서 가까운 샹젤리제 거리에 머물렀다. 그녀는 쇼팽을 방문하여 그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제니의 파리 방문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파리를 좋아하지 않았었고, 특히 치사율이 높은 콜레라의 유행으로 파리의 여름은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제니 린드의 미국 순회공연 포스터. 미국 셰필드 대학 콜렉션. [사진 Wikimedia Commons]

제니 린드의 미국 순회공연 포스터. 미국 셰필드 대학 콜렉션. [사진 Wikimedia Commons]

제니가 파리에 간 것은 병든 쇼팽을 돌보아 건강을 되찾게 하고, 미국으로 같이 가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쇼팽과 제니가 깊은 관계에 있었다는 구체적 증거는 부족하다. 특히 제니 쪽 자료가 전혀 없다. 그런데 2013년 영국의 『왕립음악협회 회보』에 매우 흥미 있는 보고서가 실렸다. 이 보고서는 자료부족을 소명하는 한 실마리가 될 수도있다.

보고서는, 멘델스존이 제니 린드에게 노골적으로 구애하는 편지들을 보냈고, 제니가 세상을 떠난 후 발견된 그 편지들을 제니의 남편이 두 당사자와 가족들의 명예를 위해 바로 폐기했다는 내용이었다. (The Journal of the Royal Musical Association 2013. Vol 138. George Biddlecombe 저(著).)

제니 린드는 독일 함부르크의 멘델스존 생가에 기념명패도 부착했는데 그의 이름을 딴 장학기금을 조성한 것까지 미루어 보면, 그녀가 멘델스존을 사랑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친구였던 또 다른 천재 작곡가 쇼팽에게 제니가 특별한 감정을 품었을 거라고 추정해 볼 수도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멘델스존의 편지를 폐기했던 것처럼, 혹시 그녀의 남편이, 쇼팽과의 관계를 암시하는 다른 자료도 폐기했다는 추정은 가능할까?

제니가 ‘병자’ 쇼팽에게 정신적 위안을 준 것은 맞다. 그리고 1855년 제니가 미국에서 돌아와 영국에 머물 때(당시 쇼팽은 이미 사망했음) ‘쇼팽의 마주르카’라는 이름으로 폴란드 순회공연을 기획했었다는 것과 그녀의 장례식에 쇼팽의 장송곡이 연주되었다는 것도 움직일 수 없는 팩트이다. ‘위대한 쇼맨’의 OST ‘Never Enough’는 들을 만하다.

다음 편에서는 스코틀랜드의 멋진 풍광 속에서 마음을 잃고 좌절하는 쇼팽의 모습이 그려진다.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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