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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민의 시선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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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정민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민 논설위원

이정민 논설위원

‘오늘날 민주주의의 붕괴는 투표장에서 일어난다.’

민주주의 붕괴하면 국가도 추락 #상대편 인정하는 상호관용 중요 #권한 신중히 사용하는 자제 필요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일갈이다. 공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투표장’과 ‘독재’의 패러독스를 통렬하게 파헤친다. 저자들은 냉전 종식 이후의 새로운 독재는 총부리가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에게서 나왔다고 지적한다. ▶심판을 매수하고(사법부 장악) ▶상대편 주전이 뛰지 못하게 하거나 ▶게임의 룰을 바꿔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드는 방식(야당 무력화)으로 이뤄진다는 주장이다.

국회의 3연속 날치기를 보며 책을 다시 빼들었다. 예산안·선거법에 이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까지 들러리 야당을 동원해 일사천리로 밀어부친 초유의 사건은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형해화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경고음이다.

공수처법은 형사사법 장악의 정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법관·헌법재판관을 우리법연구회 출신등 친정부 성향의 인사로 바꿔 사법부를 재편한데 이어 논란많은 공수처 인사까지 장악하게 됐다. 대법원·헌법재판소·검찰에다 공수처 인사까지 맘대로 주무르게 된 것이다. 원안에 들어있지도 않던 내용을 공수처법에 슬쩍 끼워넣어 사실상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를 못하도록 변질시킨 건 범죄행위에 가깝다. 이로써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는 검찰을 개혁하자는 취지는 물건너갔다. 그런데도 “눈물이 핑 돌 정도로”(조국 전 법무장관) 기쁘고, “심장이 터질 듯”(박원순 서울시장) 기쁘단다. 통제력을 상실한 심판이 휘두르는 칼춤이 정적을 탄압하는 도구로 둔갑할 때의 비극을 통탄했던 그들과 이들이 같은 부류인지 의아할 정도다.

민주주의의 붕괴는 국가 추락을 동반한다. 석유 부국 베네수엘라의 추락과 ‘술탄’ 경지에 오른 에르도안 대통령이 통치하는 터키의 추락은 닮은꼴이다. 마두로와 마찬가지로 전임자 차베스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민주 지도자였다. 차베스는 집권후 곧바로 판사들을 ‘적폐’로 단죄하고 대법원을 무력화한뒤 친 차베스 인사들로 ‘사법비상위원회’라는 2중대 사법기구를 만들며 독재자가 된다. ‘매수된 심판’은 권력의 입맛에 맞는 판결로 국회·언론을 탄압하는 충견이 됐다.

심판 매수의 유혹은 놀랍게도 민주주의 선진국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국민적 영웅이 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법원이 뉴딜정책을 좌파 정책이라며 반대하자 대법관 숫자를 늘리는 ‘대법원 재구성’ 계획을 시도한다. 헌법에 대법관 숫자 규정이 없는 걸 이용해 9명 체제의 관행을 깨고 친위세력들로 사법부를 채우려 했다. 의회가 제동을 걸어 무산시키지 않았더라면 ‘20세기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란 찬사는 사라졌을지 모른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 저자들은 민주주의는 헌법·법률의 완전성으로 지켜지는게 아니라 “법적 권한을 신중히 사용하려는 ‘제도적 자제’와 상대편을 통치할 자격을 갖춘 경쟁 상대로 인정하는 ‘상호관용’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결론내고 있다. 야당을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협상의 파트너로 받아들이는게 민주주의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어떤가. 적폐몰이와 야당 패싱으로 일관해 온 집권세력은 결국 게임의 룰까지도 야당을 배제한채 밀실에서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선거법이 누더기가 된 건 어떻게든 자유한국당이 1당이 되는 걸 막으려는 ‘불관용’ 의 결과다. 그러다보니 내가 찍은 표가 어디로 가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난수표가 돼버린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제대로 된 플레이가 이뤄질리 없다. 문제는 페어 플레이가 무너질 때 민주주의도 같이 붕괴한다는 사실이다.

자칫 “또다른 군주제로 흘러갈 수도 있는 위험으로부터 미국식 대통령제의 초석을 닦았다”는 찬사를 받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스스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실천했다. 두차례 연임후 미련없이 시민으로 돌아갔고, 집권 8년동안 국회에 대한 거부권을 딱 두번 행사했다. 대신 “내 생각과 많이 달랐지만 입법부에 대한 존경의 차원에서 여러 법안에 서명했다”는 말을 남겼다.

문 대통령조차 “볼썽사납다”고 한 난장판 국회를 뒤로하고 새해가 밝았다. 2020년 벽두, 문 대통령의 첫 업무는 추미애 법무장관 임명 재가였다. 국회의 인사청문 보고서 없이 임명된 장관(급) 수는 23명으로 늘었다. 집권 32개월 동안의 기록이다.

문 대통령이 했다던 “인사청문회 때 많이 시달린 분들이 일을 더 잘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의 주인공 나폴레옹이 연상돼서다.

이정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