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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윤석만의 인간혁명

‘기생충’ 신드롬 이면엔 불평등, 대안으로 떠오른 기본소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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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자본주의 지속가능 하려면

“‘기생충’은 디스토피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 살고 있다.”

NYT ‘2019 최고의 영화’ 선정 #미국 청년 51% 사회주의 선호 #국내 “21년부터 월 30만원” 주장 #신자유주의 대부 ‘-소득세’ 제안 #로봇세·데이터거래 등 재원 관건

미국 뉴욕타임스는 영화 ‘기생충’을 ‘올해(2019년)의 영화’로 선정하며 이 같이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반 지하와 대저택은 현대 사회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영화는 계급투쟁에 관한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 준다”고 평가합니다. 이미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은 골든글로브(5일)와 아카데미(2월9일)에서도 주요 후보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 곳곳에서 ‘기생충’ 신드롬이 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국의 가디언은 “계급 갈등을 적절히 다루면서 빈부격차의 담론에 굶주린 젊은 관객들에게 보편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설명합니다. 대다수 선진국이 겪고 있는 불평등 문제를 흥미로운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 “영화의 본고장인 미국을 흔들 수 있던”(워싱턴포스트) 이유였죠.

이는 미국의 밀레니얼(1980~2000년생)이 버니 샌더스의 사회주의에 열광하고 ‘월가 점령(Occupy Wall Street)’시위를 적극 지지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2018년 8월 갤럽 조사 결과 미국 청년들의 51%가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를 선호한다’고 답했습니다. 이는 경제적 황금기를 겪었던 부모 세대와 달리 금융위기로 대다수 실직과 파산을 보며 자란 밀레니얼에게 경제적 시련이 각인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심각한 양극화로 자본주의 위기가 도래했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미국 상위 1%의 소득은 1980년경 평균소득의 9배였는데, 2010년엔 20배로 늘어났습니다. 같은 기간 영국에선 6배→14배, 호주에선 5배→9배, 일본은 7배→9배로 증가했습니다. 대다수의 나라는 일을 해서 버는 돈(노동소득)보다 ‘돈이 돈을 버는’ 자본소득의 증가율이 훨씬 컸습니다.

이는 출신·가문에 상관없이 능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Meritocracy)’가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해법으로 피케티는 ‘글로벌 자산세’를 제안합니다. 부유층 자산의 세금을 대폭 늘려 불평등을 완화하자는 것입니다. 단 특정 국가에서 먼저 도입하면 다른 나라로 자본이 빠져나갈 것이기에 ‘글로벌’ 동시 도입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는 실현가능성이 희박합니다.

노동의 종말에 기본소득 필수

그 대신 현실성 있게 제기되는 방안이 ‘보편적 기본소득(UBI·Universal Basic Income)’입니다. 변변한 일자리가 없어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는 ‘기생충’의 주인공들처럼 미래는 직업을 얻기가 더욱 힘들어질 것입니다. “기술발전으로 인간 노동의 종말이 오고 있다”는 제레미 리프킨의 지적대로 일자리가 없어지면 소득도 종말을 고합니다. 이런 이유로 국가가 일정 소득을 보장하는 UBI가 설득력을 얻고 있죠.

UBI는 1516년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도 언급돼 있습니다. “도둑질 말고 생존할 방법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처벌도 이를 막을 수 없다, 끔찍한 처벌 대신 일정 수준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죠. 당시 지주들은 양을 키우기 위해 소작농을 쫓아냈는데(인클로저 운동) 모어는 이를 “양이 사람을 잡아 먹는다”고 풍자했습니다.

미국의 정치사상가 토머스 페인(『토지정의』)이나 경제학자 헨리 조지(『진보와 빈곤』)도 토지는 공공의 재산이므로 지대소득은 시민들이 공유해야 한다며 ‘시민배당금’을 주장했죠. 훗날 ‘시민배당금’은 ‘원유배당금(oil check)’이란 이름으로 알래스카에서 실현됐습니다. 알래스카 주정부는 1974년 유전 개발을 통해 얻은 수익을 기금으로 만들어 모든 주민에게 배당금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기금 규모는 440억 달러에 달합니다.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선 앤드류 양. '보편적 기본소득' 공약을 내세워 젊은세대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선 앤드류 양. '보편적 기본소득' 공약을 내세워 젊은세대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최근에는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선 앤드류 양이 UBI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며 젊은 층의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는 인공지능(AI)과 자동화로 혜택을 본 기업들에게 부가가치세(VAT)를 걷어 모든 시민에게 매달 1000달러씩 UBI를 지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주장에 소셜 미디어 ‘레딧’의 공동 창업자인 IT 거부 알렉시스 오하니언,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 등이 공개적 지지를 선언했죠.

한국도 기본소득당이나 LAB2050 같은 연구단체가 기본소득을 제안합니다. LAB2050은 세제를 신설하지 않고도 2021년부터 모든 국민에게 월 30만원씩 주는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아동수당과 기초연금을 폐지하고 비과세 감면 정책을 없애면 가능하다는 설명이죠. LAB2050의 이원재 대표는 “복잡한 제도를 관리하는데 필요한 행정비용을 줄이고 국가기본소득위원회를 만들어 공론화 하자”고 말합니다.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적인 정책

기본소득은 시기의 문제일 뿐 조만간 도입 가능성이 높은 정책입니다. 그 이유는 기본소득이 매우 자본주의적인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시장은 늘 막다른 길로 몰릴 때마다 새로운 해법을 찾아왔는데 불평등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발 하라리의 표현대로 기본소득은 빈곤층의 경제적 혼란에 대한 완충 작용을 하고, 대중의 분노로부터 부유층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죠.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실제로 시카고학파의 거두인 밀턴 프리드먼도 기본소득과 비슷한 ‘음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를 제안했습니다. 프리드먼은 1962년 발간한 『자본주의와 자유(Capitalism and Freedom)』에서 고소득층에게 세금을 걷듯, 저소득층에겐 보조금(음의 소득세)를 주자고 했습니다. 이는 레이건 정부에 이르러 저소득층에게 세금공제 형식으로 현금을 주는 근로장려세제(EITC)로 변용됐죠.

이처럼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인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는 설득력 높은 대입니다. 그러나 막대한 재원이 문제입니다. 기존의 복지정책을 통폐합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정부 지출이 대폭 증가할 것입니다. 한국처럼 저출산·고령화가 심각한 상황에선 급격한 세수 감소가 예상돼 재정건전성이 크게 악화될 것이고요.

국회 의원연구단체인 어젠다2050(대표 김세연 의원)은 2017년부터 전문가 토론회 등을 개최하며 기본소득의 현실화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부가세(앤드류 양)나 로봇세(빌 게이츠)를 신설하는 방법도 논의됐지만 조세 저항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 대신 개인의 데이터 거래수익을 합법화 하고 이를 기본소득의 중요 재원으로 삼자는 아이디어가 설득력을 얻고 있죠.

“개인정보 거래 대가 합당해야”

김세연 의원은 “미래에 데이터는 현재의 원유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며 “개인정보로 돈을 버는 기업이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면 가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식처럼 데이터거래소를 만들어 자유롭게 개인정보를 사고 팔 수 있게 한다는 구상입니다. 위치·이동 정보부터 쇼핑, 납세, 의료 등 제공하는 정보의 질과 범위에 따라 가격이 책정되고 개인이 그 범위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아이디어로 ‘국가기술 배당금’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2020년 정부의 R&D(연구개발) 예산은 24조 2200억 원입니다. AI·바이오·블록체인 등 미래형 기술 개발에 집중 투자합니다.

이렇게 정부는 매년 막대한 예산을 R&D에 투자하지만 실제 그 기술이 어떻게 산업에 적용되는지, 시장에서 얼마나 수익을 내고 있는지 살펴보진 않았습니다. ‘국가기술 배당금’은 정부 예산이 투입된 기술이 상용화됐을 경우 생기는 수익의 일정 부분을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쓰자는 취지입니다. 알래스카의 ‘오일 체크’와 같은 원리죠.

싱가포르의 테마섹(Temasek)이나 중국투자공사(CIC),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투자청(ADIA)과 같은 국부펀드를 만들어 기본소득 기금으로 운용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ADIA의 경우 연간 수천억 달러를 운용하는데, 수익의 상당 부분이 미래 산업과 인재를 육성하는데 쓰이고 있습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의 대가』에서 “불평등은 시장의 장점인 역동성과 생산성을 마비시켜 사회 전체를 침몰시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양극화를 완화하고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성장을 견인할 수 있다”고 강조했죠. 불평등 해결은 정의와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의 지속을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에서도 머지않아 기본소득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이뤄질 것입니다.

키워드

시카고학파
20세기 중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등 시카고대학 교수들이 주축이 된 경제학파. 정부의 개입보다 시장의 자율을 강조하며 신자유주의의 뼈대를 이뤘다. 훗날 레이거노믹스의 사상적 기반이 된다.

능력주의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1958년 출간한 『능력주의 사회의 부상(The Rise of Meritocracy)』에서 ‘귀족주의(aristocracy)’의 반대말로 만든 개념. 출신과 가문이 아닌 실력에 따라 보수와 지위가 결정되는 체제를 뜻한다.

윤석만 사회에디터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