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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 이 좋은 걸 어르신만 봤네…스포츠 예능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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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태백에서 금강까지-씨름의 희열'에서 활약 중인 손희찬(왼쪽)·이승호 선수. 아이돌 못지 않은 외모와 몸매로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KBS]

'태백에서 금강까지-씨름의 희열'에서 활약 중인 손희찬(왼쪽)·이승호 선수. 아이돌 못지 않은 외모와 몸매로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KBS]

“직관(직접 관람) 신청했어요! 대박!! 이 선수들을 직접 볼 수 있다니 꿈만 같습니다!”

KBS 씨름 오디션프로 2030 열광 #식스팩 얼짱 선수에 여심 흔들 #“샅바와 내 마음을 잡았어” 댓글 #‘뭉쳐야 찬다’ 등 영역 확장 중

“씨름 너무 재밌어요! 제가 여기에 글을 쓰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KBS2 예능 ‘태백에서 금강까지-씨름의 희열’의 시청자게시판에 올라온 후기다. ‘씨름의 희열’은 씨름 선수들이 경쟁을 벌여 최후의 1인자를 가리는 과정을 담은 스포츠 리얼리티 예능이다. 씨름판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인 셈이다. 지난해 11월 30일 첫 방송에서 2%의 시청률을 기록한 이 프로그램은 2회 2.4%, 3회 3.0%로, 4회 2.5%를 기록 중이다. 비인기 종목을 다뤘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대 이상 선전’이라는 게 방송가의 평이다.

1990년대 들어 인기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중장년층만의 볼거리로 전락했던 씨름이 최근 미디어와 결합하며 ‘뒤집기’를 시도 중이다. 시작은 지난해 9월 유튜브에 오른 한 씨름대회 영상이었다. 아이돌 못지않은 외모와 몸매를 가진 청년 씨름선수의 경기 영상이 말 그대로 ‘히트’를 쳤다. 조회 수가 220만 건에 달하고 댓글은 1만6000개가 달렸다. “이 좋은 걸 할배들만 보고 있었네” “넌(황찬섭 선수) 두 가지를 잡았지. 샅바 그리고 내 마음” 등 호평 일색이다.

유튜브로 연예인 반열에 오른 황찬섭 선수가 소속된 인천 연수구청 씨름단의 한대호 감독은 “씨름에 대해 살집 좋은 거구들의 느리고 지루한 힘겨루기 정도로 생각했던 젊은 층들이 식스팩의 탄탄한 몸매를 가진 얼짱 선수들의 역동적 움직임에 매료된 것 같다”고 말했다. 유튜브나 ‘씨름의 희열’에 가장 열광적 반응을 보이는 것도 20~30대 여성층이라고 한다.

‘씨름의 희열’도 이런 점에 착안해 출연 선수들을 경량급인 금강(90kg 이하)·태백(80kg 이하) 급으로 한정했다. ‘씨름의 희열’을 제작하는 박석형 PD는 “역동적이고 빠른 기술 씨름을 보여줘야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해 경량급 선수들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강호동, 안정환, 허재(왼쪽부터)

강호동, 안정환, 허재(왼쪽부터)

예능과 스포츠의 결합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씨름선수 출신 강호동을 시작으로 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예능에 진출해 인기를 얻었다. 다만 최근엔 관련 포맷이 보다 다양해지면서 스포츠 스타들의 진출 폭도 넓어지고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스포츠와 예능이 결합한 장르는 3세대에 걸쳐 진화했다”고 설명했다.

1세대는 1990년대 중반 천하장사였던 강호동의 연예계 데뷔다. 정 평론가는 “당시 강호동은 운동선수 출신이었을 뿐 주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콩트를 하면서 개그맨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후 데뷔한 야구선수 출신 강병규도 수려한 언변과 순발력을 바탕으로 전문 MC로 주목을 받았다.

2세대는 2000년대 들어 한국 스포츠가 급성장하면서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박지성, 안정환 등 유럽리그에 진출하는 선수들이 늘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선 야구가 금메달을 따면서 인기가 치솟았다. 또 김연아 선수의 피겨스케이팅 활약도 국민적 관심사였다.

그러면서 연예인들이 인기 운동 종목에 도전하는 스포츠 예능이 우후죽순 나왔다. 연예인 야구팀이 전국의 아마 야구단을 찾아가 시합을 벌이는 ‘천하무적 토요일-천하무적 야구단’(KBS2)이나 연예인들이 김연아 선수의 지도를 받아 피겨스케이팅에 도전하는 ‘키스앤크라이’(SBS)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과정에서 스포츠 선수들의 예능 활동의 문턱이 낮아졌다.

최근에는 대세가 된 리얼리티와 오디션 프로그램과 함께 스포츠와 예능의 결합이 본격화됐다.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나 JTBC ‘뭉쳐야 찬다’에 출연 중인 이동국·안정환 선수 등은 과거 같은 감초 역할이 아니라 예능 프로의 주인공으로 맹활약하고 있다. 예능에서 얼굴을 볼 수 있는 스포츠 선수들도 과거보다 큰 폭으로 확장되고 있다. 허재·서장훈·양준혁·여홍철·이봉주·심권호 등 화려한 경력을 갖춘 ‘레전드’급 선수들이 대거 진입했다.

최근 예능이 스포츠 선수와 좋은 궁합을 보이는 이유는 뭘까.

유호진 tvN PD는 스포츠 선수 특유의 ‘캐릭터’를 꼽았다. “연예인들은 대중들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다 보니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고, 튀는 발언을 하기도 쉽지 않다. 반면 스포츠 선수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툭툭 다 해도 대중들이 용인해 준다. 그런 점이 최근 주목을 받는 리얼리티 장르와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현실적인 캐스팅 문제도 있다. 한 방송 관계자는 “예능프로그램에서 솔직히 A급 배우나 가수는 섭외가 어렵다. 반면 운동선수들은 A급 선수들도 비시즌에는 출연에 호의적이다. 대중들에겐 인기 운동선수도 연예인 못지않은 선망의 대상이기 때문에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좋은 자원이 된다”고 말했다.

반면 해외에서는 인기 스포츠 스타들이 이렇게 다양한 예능에 출연하는 경우가 드물다.

NBA 특급 센터였던 샤킬 오닐이 래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유명 선수들은 은퇴 후에도 감독, 구단주, 해설자 등 관련 직종에서 활동하는 게 일반적이다. 전설적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은 NBA 구단인 샬럿 호네츠의 구단주이고, 잉글랜드 축구팀의 간판 공격수였던 게리 리네커도 10년 넘게 BBC ‘매치 오브 더 데이’의 진행을 맡고 있다. 허구연 MBC 야구해설위원은 “미국은 야구만 해도 메이저리그부터 싱글A리그까지 팀이 수백개에 달하고 데이터분석가, 에이전트 등 운동선수들이 제2의 인생을 펼칠 수 있는 다양한 직종이 있다. 하지만 한국은 프로스포츠팀도 많지 않고, 관련 인프라도 초보 수준이다. 야구단 구단주나 단장도 선수보다는 모기업 출신들이 많다. 선수들이 자꾸 밖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요인”이라고 짚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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