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만의 인간혁명]'좌파적 신자유주의'는 불가능?
지난 주 '인간혁명'은 고담의 배트맨과 뉴욕의 블룸버그를 비교해 봤습니다. 처음 블룸버그가 내년 미국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 워싱턴 포스트는 “트럼프가 갖지 못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그는 훌륭한 대통령은 될 수 있을 것이나 민주당 후보가 되기엔 힘들 듯하다”고 밝혔습니다. 워싱턴 포스트의 표현처럼 그의 장점은 곧 단점이기 되기도 합니다. 이는 바로 '하이브리드 실용성'입니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블룸버그가 갖는 정치적 상징성은 매우 큽니다. 먼저 그는 ‘공화당 vs 민주당’으로 고착화 된 기성 정치의 틀을 벗어나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도 ‘진보 vs 보수’로 이분돼 모든 이슈가 하나의 프레임으로 환원되는 것처럼 미국에서도 이런 당파적 구도가 선거 국면에선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 선거의 단골 이슈는 총기규제, 낙태, 동성결혼, 파병, 감세 등입니다. 여러 주제를 놓고 각각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는 각 집단에서 일관된 경향성을 갖습니다. 공화당 지지자는 파병과 감세를 찬성하고 총기규제 및 낙태와 동성결혼은 반대는 형식이죠. 민주당 지지자는 이와 반대 입장을 보이고요.
블룸버그의 강점은 하이브리드
그런데 블룸버그는 두 입장이 섞여 있어 기성 정치에선 이단아로 평가됩니다. 그는 먼저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와 미국 우선주의, 다문화를 배척하는 이민정책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심지어 그는 트럼프의 탈퇴로 문제가 된 파리기후변화 협약에 내야할 미국 분담금을 자신이 내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죠. 이는 민주당의 기존 입장과 비슷합니다. 아울러 낙태와 총기규제 등에 있어서도 진보적 입장이죠.
반대로 그는 공화당 소속으로 두 차례나 뉴욕시장을 연임했고, 기업가 출신으로 시장의 자율성을 강조합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입장을 놓고도 민주당 유력 대권 후보들은 거센 공격을 퍼붓습니다. 그의 출마 소식이 알려지자 지난달 9일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유감스럽지만 선거를 돈으로 사지는 못할 것”이라고 일갈했죠.
하지만 일각에선 블룸버그의 이런 하이브리드적 성향이 오히려 중도층을 흡수해 민주당의 외연을 넓힐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이전보다 세상은 더욱 다원화되고 복잡해졌는데, 언제까지 ‘공화당 vs 민주당’의 프레임에만 갇혀 있을 것이냐는 지적이죠. 즉, 기업을 위한 법인세 인하를 찬성하면서도 동성 결혼도 함께 찬성할 수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진영 논리에 빠진 한국 정치
한국은 미국보다 더욱 심각한 진영 정치에 빠져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갈등 이슈는 대북 정책과 외교 문제, 시장의 자율성, 사회적 가치에 대한 개방성 등이 있습니다. 진보 진영은 북한에 대해 호의적인 ‘햇볕 정책’을 지지하고 시장에 적극 개입하며 증세를 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보수 진영은 반대로 대북 지원을 ‘퍼주기’로 해석하고 정부의 시장 개입을 줄여 세금도 낮춰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정책적 측면에서 일관된 경향성을 보이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한국 정치에선 진영 논리가 정책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통해 형성되는 게 아니라, 인물을 중심으로 판이 짜입니다. ‘조국 사태’를 둘러싼 광장의 시위가 대표적입니다. 시민들은 두 패로 나뉘어 ‘조국 수호’와 ‘조국 반대’를 외치며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분노를 쏟아냈지만, 어느새 사건의 본질은 사라지고 진영 논리만 남았습니다.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정치인들입니다. 한국 사회의 진보와 보수를 세밀히 따져 보면 정책에 대한 이념 차이로 나뉘어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보다는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느냐, 혹은 하지 않느냐의 문제죠. 정책에 대한 찬반 여부에 따라 정파적 구도가 형성된 미국과 달리 어떤 인물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정치 진영이 나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한국의 대의민주주의 수준이 그만큼 낮다는 뜻이고요.
원로 정치학자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한국의 정치 세력은 정책적 대안을 먼저 제시하고 이를 둘러싼 경쟁을 통해 대통령이 되는 게 아니라 아무 대안도 없이 당선돼 뒤늦게 정책을 만들고 통치 이념으로 삼는다”며 “정당 간 정책적 차이가 없고 기득권만 대표는 하는 정치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서민과 노동 계급의 요구는 대표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정당은 19세기 근대화의 산물
현재처럼 정당을 통한 대의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것은 산업혁명 이후인 19세기부터입니다. 서구사회에선 자본가인 부르주아 계급과 그에 맞서는 노동자 계급이 갈등과 균열의 중심축이었고 이들을 대표하는 양대 정당이 만들어졌습니다. 중요한 사회적 이슈는 대부분 정당을 통해 조정되고 합의점을 찾았죠.
그러나 사회가 분화되고 발전하면서 계급 외에도 다양한 갈등 요소가 생겼습니다. 젠더, 세대, 문화, 환경 등 복잡한 이해관계를 대표하고 조율할 수 있는 ‘대의’ 기능이 더욱 중요해진 거죠. 이 때문에 유럽은 다양한 가치를 표방하는 군소정당이 존재하며, 이들이 연정을 통해 합의점을 찾습니다.
하지만 한국 정치에는 다양한 사회 균열과 갈등을 대표할 만한 정치 세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민들의 목소리는 다양한데 한국 정치는 진보와 보수 2개의 진영 논리뿐입니다. 무슨 이슈를 대입해도 한국 정치는 진보의 ‘적폐’와 보수의 ‘빨갱이’로 찢어져 있습니다. 말로는 서로 진보와 보수 정당을 대표한다고는 하지만 정책으로 경쟁하려하지 않고, 지역주의와 색깔론, 적폐·친일 논란 같은 자극적 이슈로만 지지자를 끌어들이려 합니다.
그렇다 보니 한국의 시민들은 정책을 보고 정당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 당 대표나 대선 후보와 같은 간판 정치인을 보고 투표합니다. 정책에 대한 찬반도 그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고 결정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인물 먼저 정해 놓고 그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따릅니다. 지난 8월 공지영 작가가 조국 전 장관에 대한 찬성 의사를 밝히며 "나는 문프(문재인 대통령)께 모든 권리를 양도했다, 문프가 그를 적임자라고 하니 지지한다“고 말한 게 대표적입니다.
'좌파적 신자유주의'는 불가능할까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는 ‘견제와 균형(check and balance)’이 잘 이뤄져 있어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국가와 시장, 시민사회가 자율적으로 움직이며 조화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야 하죠. 국가 권력은 다시 입법부와 행정부, 사법부의 3권 분립이 보장돼 있어야 하고요. 그러나 한국 정치는 입법·사법부가 행정부에 장악된 모습입니다. 대통령과 국회가 서로 견제와 균형을 찾는 구도가 아니라 ‘청와대·여당 vs 야당’의 기울어진 운동장이죠.
진영 정치는 이 같은 대결 구도를 사회 전체로 수직계열화 합니다. 시민사회와 국가가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지 않고, 시민사회의 세부 영역(언론·시민단체 등)마저 ‘진보 vs 보수’ 프레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윤성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책만 놓고 보면 한국 사회의 이념 갈등은 크지 않지만 어떤 대통령, 어느 정치세력을 지지하느냐를 따지면 갈등이 매우 커진다”며 “이념에 따라 정파가 나뉘는 게 아니고 정파 갈등이 이념 갈등을 부추긴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정치 세력 간에 합리적 토론이나 타협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이슈를 ‘내 편 네 편’으로 가르며 대립하기 때문에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울러 건전한 내부 비판까지 진영 논리를 벗어나면 매장되기 일쑤입니다. 최근 조국 전 장관을 비판했던 김경율 참여연대 전 집행위원장과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진보층 내부에서 궁지에 몰렸던 게 대표적입니다.
윤성이 교수는 그 대안으로 갈등의 다양화·공론화를 제시합니다. “다양한 사회 균열이 정당을 통해 대표될 수 있어야 하고 생활세계의 여러 이슈들이 시민사회에서 적극적으로 공론화 돼야 한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했던 ‘좌파적 신자유주의’ 같은 사례라 통용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노 전 대통령은 집권 당시 이 표현으로 좌우파 양쪽으로부터 공격 받았습니다. 하지만 “대북정책에 있어선 좌파적 입장을 보이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해선 우파적 입장을 갖는 것이 왜 불가능 하느냐”는 것이죠.
광장의 광기를 키우는 정치갈등
진영 논리는 한국 정치의 가장 본질적 문제점입니다. 이를 깨기 위해선 하이브리드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앞서 살펴본 블룸버그의 사례처럼 정책과 이슈에 따라 진보·보수의 고정관념을 따르지 않고 유연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치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갈등과 균열을 반영할 수 있으려면 지금보다 훨씬 ‘오픈 마인드’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만 옳다는 진영 논리를 내세우면 시민들은 광장의 아노미 상태에 놓일 뿐입니다.
영화 ‘조커’에서 성난 군중들은 자신의 목소리가 대표되지 못한다는 걸 알고선 거리로 나섰습니다. 정치가 다양한 사회 균열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면, 광장의 혼란과 갈등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정당정치는 오히려 시민들이 거리로 나오길 부추깁니다. 시민의 의중이 무엇인지 파악해 정치적 의사를 대변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오히려 시민을 선동합니다. 이 때 특정 정치인과 정파에 대한 맹목적 지지는 광장의 광기를 키울 뿐입니다.
칼 포퍼는 ‘개인이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자율적 행동을 통해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를 열린사회라고 정의합니다. 반대로 폐쇄적 민족주의와 전체주의처럼 피아 구분이 명확하고 상대의 의견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닫힌사회라고 비판합니다.
열린사회를 향한 길
광장은 4.19 혁명이나 87년 민주항쟁처럼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고 역사를 발전시키기도 합니다. 이는 자율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열린사회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70만 명이 모였던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뉘른베르크 군중집회는 전체주의로 가는 지름길이었습니다.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 지지와 자기만 옳다는 폐쇄적 민족주의를 통해 닫힌사회로 가는 잘못된 길이었죠.
지금 우리 앞의 광장은 열린사회를 위한 걸까요, 닫힌사회를 향한 걸까요. 지금 우리의 정당정치는 시민의 목소리를 ‘대의(代議)’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자신이 ‘대의(大義)’라고 믿는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 시민을 선동하는 걸까요. 길 끝이 희미해 잘 보이지 않지만, 포퍼의 다음과 같은 말을 되뇌어 본다면 우리가 갈 길은 명확해집니다.
“우리는 짐승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문명사회의 인간으로 남길 원한다면 우리에겐 단 하나의 길, 열린사회의 길만 있을 뿐이다.”
#'윤석만의 인간혁명'은 월간중앙 1월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윤석만은
논설위원 겸 사회에디터. 국회·청와대·교육부 등 다양한 출입처를 거쳤다. 2012년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고려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경희대에서 미래 사회를 주제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과학·기술·산업만이 아닌 인간과 문화, 의식과 제도의 측면에서 조망하며 미래인문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휴마트 씽킹』, 『리라이트』, 『인간혁명의 시대』(2018 세종도서), 『미래인문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