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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도 경영에 참여? …다시 바람 부는 노동이사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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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출입은행이 이사 선임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추천을 받는 방안을 검토한 사실이 알려졌다. 실제 선임이 이뤄지면 금융권에서 노조가 경영에 참여하는 첫 사례다. 노동이사제 도입 요구가 금융권 전체로 확산하는 발화점이 될 수 있다. 도입 여부를 놓고 찬반 논란도 확산할 전망이다. 쟁점을 짚어봤다.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수출입은행 이사는 은행장이 추천하고, 기획재정부 장관이 임명한다. 이사 6명 중 2명(비상임)의 임기가 이달 만료되는데 선임 과정에서 노조의 추천을 받겠다는 것이다. 수출입은행도 노조와의 대화 과정에서 제안이 오간 사실을 인정했다.

노동이사제는 노동자가 이사회에 직접 참여하는 걸 말한다. 금융권에서 구체적인 요구가 처음 나온 건 2017년 11월이다. KB노조는 KB금융지주 주주총회에서 노조가 추천한 이사를 선임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찬성표가 적어 부결됐다. KB노조는 2018년 3월과 올해 2월에도 노조 추천 이사 선임을 요구했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IBK기업은행 노조도 추천서를 전달하는 형태로 이사 선임을 요구한 적이 있지만 무산됐다.

노조 추천 규정 없어 우회로 택한 KB노조  

보통 노조가 이사를 추천할 수 있다는 규정은 없다. KB노조가 우리사주조합을 통한 주주제안이라는 우회로를 택한 이유다. 국책은행인 수출입은행엔 우리사주조합이 없다. 그렇다고 추천하면 안 된다는 규정도 없다. 수출입은행 정관엔 이사를 추천하는 별도의 절차가 없다. 사실상 노조의 추천을 받기로 경영진이 판단만 하면 되는 셈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은행장이 이사 추천권을 노조에 양보하는 첫 사례다. 수출입은행 관계자는 “협의를 진행한 건 사실이지만 반드시 넣겠다고 합의한 건 아니다”라며 “다음 주 중 복수의 후보를 추천할 텐데 노조 추천 인사가 포함될지도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수출입은행이 노조 추천을 받겠다고 결정하면 노동이사제 도입 움직임이 금융권 전체로 빠르게 확산할 가능성이 크다. 여러 차례 무산됐어도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다. 2017년 KB 노조가 주주총회에서 추진한 이사 선임 안건은 부결됐지만, 당시 국민연금은 찬성표를 던졌다. 법적 효력은 없지만, 금융위원회 자문기구인 금융행정혁신위원회가 최종 권고안에 ‘금융사에 근로자추천이사제 도입 검토를 권고한다’는 내용을 담기도 했다.

노조의 추천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해도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노동계가 ‘공약을 지키라’고 주장하고 있어서다. 문재인 대통령은 “공공부문부터 노동이사제를 도입하고 민간기업으로 확산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선 이후 100대 국정과제에도 포함됐다. 노동계 내에선 이번 정권 내에 물꼬를 터야 한다는 기류가 강하다. 또한 KB노조에서 세 차례에 걸쳐 노조 추천 이사제를 추진한 핵심 인물이 박홍배 현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 위원장이다. 머지않아 금융노조 차원에서 노동이사제 도입을 요구할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노동이사제는 장점이 있다. 현장의 아이디어를 반영하고, 탁상 경영의 폐해를 막을 수 있다. 애사심과 의욕을 고취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분석도 있다. 현재 금융권 노조가 요구하는 건 노동이사제의 전 단계인 근로자추천이사제다. 일단 노조가 추천한 외부 전문가가 경영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현장 근로자 목소리 반영" VS "노사갈등 증폭시킬 것"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노동이사제까진 아니어도 추천권을 통해 현장 근로자의 목소리와 생각을 반영하는 건 의미가 있다”며 “폐쇄적인 기업의 이사회 환경을 고려할 때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창구로 활용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노동이사제는 노사 협력 문화가 자리 잡은 일부 유럽 국가에서나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 10월 발표한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의 노사 간 협력 부문 순위는 141개국 중 130위에 머물렀다. 과도한 노사 갈등이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야기하고, 경제사회노동위원회 같은 사회적 대화체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킬 것이란 지적도 있다. 적대적 노사 관계 속에서 노동이사가 갈등을 이사회로, 경영으로 확전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란 의미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제도 도입의 이유나 효과, 예상되는 부작용 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고, 노동이사의 책임과 권한도 매우 모호한 상태”라며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시혜를 베풀 듯 이사를 추천하라고 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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