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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해 시인은 오늘도 머리를 쥐어뜯는가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전새벽의 시집읽기 (50)

연말이 되자 자연스럽게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언제나처럼 다사다난한 해였다. 한데 생각해 보니 굵직한 사건들은(사회적 이슈이든 개인사든) 모두 말(言)에서 비롯되었다. 기쁨이 되었던 말이 있고 아픔이 되었던 말이 있다. 말이 이렇게 우리를 휘두르는 한 우리는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어쩔 수 없는 언어적 존재다.

그 말을 이용해 타인을 할퀴는 사람들이 있다. 공격이 의도적인 경우 당연히 아프거니와, 의도적이지 않을 때는 의의로 더 아프다. 비의도적 공격이란 무신경함에서 비롯되기 마련이고, 무신경함이란 언제 어느 때고, 누구를 대상으로라도 발현될 수 있는 공격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위협 속에서 문학의 어깨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다. 피겨 스케이팅 꿈나무들에게는 얼음판 위에서 노는 것 자체가 하나의 훈련인 것처럼, 언어적 존재인 우리에게는 말을 활용한 놀이, 즉 문학이 일종의 훈련이므로 시를 읽고 쓰는 당위가 거기에 있다. 사르트르의 말을 빌린다.

말에서 비롯된 기쁨과 아픔이 있는 한 우리는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어쩔 수 없는 언어적 존재다. [사진 pixabay]

말에서 비롯된 기쁨과 아픔이 있는 한 우리는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어쩔 수 없는 언어적 존재다. [사진 pixabay]

“두말할 것 없이 모든 시에는 산문의, 다시 말하면 성공의, 어떤 형식이 있다. 그리고 거꾸로, 가장 무미건조한 산문도 항상 약간의 시, 다시 말하면 좌절의 어떤 형식을 감추고 있다. 어떤 산문 작가도(가장 명석한 산문 작가도), 그가 말하려는 것을 완전히 말하지는 못한다. 그는 너무 지나치게 말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불충분하게 말한다.”

그는 왜 산문을 성공에 대입하고 시를 좌절에 대입했을까. 그 질문을 던지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작업은 “언어의 목적은 전달에 있기 때문”이라는 그의 말을 곱씹는 것이다. 말은 결국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쓰인다. 산문이란 그 전달이 성공하기를 바라며 쓰는 것이다. 산문의 문장들이 전부 A는 B라는 식의 명료한 서술인 까닭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말대로 어떤 산문작가도 그가 말하려는 것을 완전히 말할 수가 없다. 그 원인을 설명하는 일은 매우 복잡하리라고 사료되나, 간단하게 말할 수도 있다. 언어의 불완전성 때문이다.

언어의 불완전성 앞에서 좌절한 사람들은 애초부터 전달이 성공하기를 체념하고 글을 쓰기도 한다. 그것이 시가 된다. 좌절의 형식이란 그런 뜻이다. 하여 시는 필연적으로 난해하고, 필연적으로 비(非)대중적이다. 시는 태생이 독백이고, 고독사가 제 운명이다. 그러나 독백처럼 쓰인 그 글이 누군가와 공명할 때, 그것이 갖는 힘은 놀라울 정도로 강렬하다. 그 한 번의 공명을 위해 시인들은 오늘도 머리를 쥐어뜯는다. 사르트르는 이 심경까지 탁월하게 표현해냈다. 위에서 인용한 그의 말은 이렇게 끝이 난다. “구절마다 도박이고 떠맡은 모험이다.” 그럼에도 이 도박과 모험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하고, 그 작업은 결국 말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독백처럼 쓰인 글이 누군가와 공명할 때, 그것이 갖는 힘은 놀라울 정도로 강렬하다. [사진 pixabay]

독백처럼 쓰인 글이 누군가와 공명할 때, 그것이 갖는 힘은 놀라울 정도로 강렬하다. [사진 pixabay]

한편 필자처럼 시를 읽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도 있다. 시 읽기를 위한 노력은 의외로 시 쓰기를 위한 노력에 맞먹는다. 두 행위가 본디 닮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꾸준한 관찰과 은유적 상상력, 그리고 어느 순간에도 굴하지 않는 유머를 요구하는 데다가 모든 산 것들에 대한 살가운 애정, 낮은 곳을 굽어보는 시선,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해내는 능력까지 요구하고 만다. 그러니 쉽지 않은 일일 진데 부디 시를 쓰는 자들이여, 새해에도 온몸으로 시를 쓰시라. 마찬가지로 필자도 노력하겠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신경함을 온몸에 두른 채 타인을 괴롭히는 이들을 몰아내고, 불완전한 언어의 한계를 조금씩 극복해나가며, 모호한 것들이 명백해지는 시대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자. 끝으로, 다시 한번 사르트르를 인용한다.

“이처럼 작가의 기능은 세계를 모르는 자가 아무도 없게 만들고, 아무도 세계에 관해서 나는 책임이 없다면서 회피할 수 없도록 행동하는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 |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철학가. 파리에서 공부한 뒤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베를린으로 넘어가 하이데거를 연구하였다. 〈구토(1938)〉를 비롯한 소설로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 이후 〈존재와 무(1943)〉라는 철학 논문을 통해 실존주의 철학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 결혼으로도 유명하며, 1964년에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하였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Qu'est-ce que la littérature?)』| 위에서 인용한 사르트르의 말들은 모두 이 책에서 인용했다. 1948년에 출간되었고, 우리나라에는 1972년에 문예출판사에 의해 소개되었다. 사르트르는 책에서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쓰는가’와 같은 원초적인 질문들을 통해 문학과 철학과 삶에 대한 견해를 서술한다. 불문학자인 故김붕구 선생께서 번역했고, 무명작가 전새벽이 평소 ‘진지한 문학 얘기’할 때 빼놓지 않는 책으로 알려져 있다.

회사원·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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