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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1971년 성탄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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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에스더 기자 중앙일보 팀장
이에스더 복지행정팀 기자

이에스더 복지행정팀 기자

“정부와 여당에 묻겠습니다.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한테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이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1971년 12월 25일. 군사독재 서슬이 퍼렇던 시절, 상상도 할 수 없는 반정부 멘트가 KBS TV를 통해 전국에 생방송됐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한 성탄절 자정 미사 강론 가운데 일부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장기집권의 꿈을 꾸며 3선 개헌안을 밀어부쳤다. 이어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국가의 안전과 관련되는 내정·외교, 국방상 조처를 취할 수 있는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법을 통과시키려 했다. 국회를 무력화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려는 의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김 추기경이 공개적으로 던진 질문은 생방송을 지켜보던 박 대통령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박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며 방송국에 방송중지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뒤에 이 일을 회고하며 “그때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난 그 발언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꼭 해야할 말이지만, 아무도 할 수 없는 말이었기에 그가 나선 것이다.

그로부터 16년 뒤 ‘4·13 호헌 조치’에 맞선 시민들과 학생들이 명동성당으로 피신했을 때 김 추기경은 또 한번 나섰다. 경찰이 성당에 무력 진압을 시도하려 할때 그는 일갈했다. “여기 공권력이 투입되면 맨 앞에 당신들이 만날 사람은 나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라.”

성탄 아침, 종교인을 넘어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었던 그가 몹시 그리워진다.

이에스더 복지행정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