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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0만원밖에 못 내 미안합니더” 키다리아저씨 또 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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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20일 대구 동성로에서 열린 ‘사랑의 온도탑’ 제막식에 참석한 맑은소리소년소녀합창단이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사진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20일 대구 동성로에서 열린 ‘사랑의 온도탑’ 제막식에 참석한 맑은소리소년소녀합창단이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사진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퇴근했는교? 시간 되면 잠깐 만납시더.” 23일 오후 7시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이하 대구모금회)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매년 이맘때마다 듣는 익숙한 음성이었다.

대구 60대, 8년간 10억원 선행 #“가족이 미리 1억 기부해 줄었다 #19세에 가장돼 어려운 이 애환 알아”

약속 시간을 정하고 대구모금회 직원이 대구 수성구 황금동의 한 제과점을 찾았다. 가게 한 편에 노부부가 미리 자리를 잡고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매년 12월이면 익명으로 대구모금회에 거액을 기부하는 60대 남성과 그의 부인이었다. 남몰래 묵묵히 나눔을 이어간다고 해서 대구의 ‘키다리 아저씨’로 불린다.

키다리 아저씨는 대뜸 하얀 봉투부터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금액이 적어서 미안합니다. 나누다 보니 그래요’라고 적힌 메모 한장과 2300여만원 상당의 수표가 들어 있었다. 키다리 아저씨는 “가족 이름으로 먼저 1억원을 기부해 금액이 지난해보다 줄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올해는 경기가 무척 어려워 기부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매년 기부를 실천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 매달 1000만원씩 12개월 간 적금을 부었고 그 돈으로 기부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대구의 ‘키다리 아저씨’로 불리는 익명의 기부자가 지난 23일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한 2300여만원과 메모. [사진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대구의 ‘키다리 아저씨’로 불리는 익명의 기부자가 지난 23일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한 2300여만원과 메모. [사진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이처럼 사정이 여의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키다리 아저씨가 기부를 이어가는 이유는 뭘까. “부친을 일찍 여의고 19세에 가장이 됐어요. 어린 나이에 가족들을 먹여 살리다 보니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의 애환을 잘 알게 됐죠. 저와 비슷한 생각으로 성금을 낸 사람들의 기부금을 필요한 이웃들에게 잘 썼으면 좋겠어요.”

옆에 있던 키다리 아저씨의 부인도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승용차도 10년 이상 타고 늘 아끼며 살았습니다. 비록 적은 돈일지라도 저희 부부가 쓰고 싶은데 쓰지 않고 소중하게 모았습니다.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지만 나눔을 통해 얻는 행복만큼 큰 것은 없지요.”

키다리 아저씨의 자녀들 또한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한다고 했다. 키다리 아저씨는 처음엔 자녀들에게조차 자신의 기부 사실을 숨겼다. 하지만 언론에 보도된 키다리 아저씨의 필체를 보고 아버지임을 한 눈에 알아봤다고 한다.

24일 대구모금회에 따르면 키다리 아저씨는 2012년 1월 처음 대구모금회를 방문해 익명으로 1억원을 전달하며 나눔을 시작했다. 이어 같은 해 12월 사무실 근처 국밥집에서 1억2300여만원을, 2013년 12월엔 사무실 근처로 직원을 불러내 1억2400여만원을 건넸다. 이후에도 키다리 아저씨는 한 해도 빠지지 않고 1억원이 넘는 돈을 기부했다.

이렇게 키다리 아저씨가 2012년부터 8년 동안 9회에 걸쳐 기탁한 성금은 9억8000여만원에 이른다. 이는 대구모금회의 역대 누적 개인 기부액 중 가장 많은 액수다.

키다리 아저씨는 “대구는 나눔의 저력이 있는 도시”라며 “경기가 어려운 상황인데도 여러 사람들의 나눔이 이어지는 모습들을 보며 우리 사회가 성숙해 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희정 대구모금회 사무처장은 “올해도 잊지 않고 거액의 성금을 기부해 주신 키다리 아저씨에게 대구의 소외된 이웃을 대표해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며 “기부자의 뜻에 따라 소중한 성금을 대구의 소외된 이웃들에게 잘 전달하여 나눔으로 더 따뜻한 대구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대구=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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