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딩학원 거부한 '코딩 아버지'…고개 끄덕인 한국 8위 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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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엽 기자

‘2019 퓨처랩 미래 교육 콘퍼런스’에서 국내외 최고 석학들이 모여 미래 교육의 방향에 대해 심도 있는 대담을 나눴다. 좌측부터 이욱정 KBS PD(대담 진행자), 미첼 레스닉 MIT 교수,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 권혁빈 스마일게이트 희망스튜디오 이사장. [사진 스마일게이트]

서너 살부터 시작되는 초(超) 조기교육. 좋은 교육프로그램이 있다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은 대기 인원만 100명이 넘는다. 학부모들이 정보를 주고받는 인터넷 카페에는 "코딩학원 추천 바란다"라든가 "내년부터 유치원에서 코딩을 정규과정에 넣는다고 안내 책자가 왔다"는 글도 눈에 띈다. '내 자식이 뭘 먹고 살지'에 대한 고민은 '영유'(유아 영어학원을 일컫는 '영어유치원'의 줄임말) 열풍을 넘어 부모들의 불안감으로 이어진다.

'스크래치' 개발한 미첼 레스닉 MIT 교수 방한 #권혁빈 스마일게이트 창업자, 최재천 석좌교수와 대담

한국의 8번째 부자, 권혁빈 스마일게이트 이사회 의장.
코딩SW '스크래치(Scratch)'의 아버지, 미첼 레스닉 MIT 교수.
'통섭'의 대가,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이들 세 사람이 '다음세대 교육'을 주제로 한 자리에 모였다.

1시간 먼저 도착한 은둔의 창업가

23일 오후 1시 10분. 대담 시작 1시간 전 성남시 판교 스마일게이트 강연장에 권혁빈 희망스튜디오 이사장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외부에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는 이날도 청중보다 먼저 도착했다. 그는 미첼 레스닉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 석좌교수와 약 5분간 대화를 나눴다. 은둔형 경영자로 유명한 권 이사장이지만 미래 세대 교육에 대해서만은 큰 손짓을 해가며 얘기할 만큼 열정적인 모습이었다.

권혁빈 이사장이 미래 교육의 항목으로 '다양성 존중'을 써넣고 있다. 정원엽 기자

미리 행사장에 도착한 권 이사장은 강연장 뒤쪽에 배치된 '[ ]교육 : 미래를 살아가는 힘'이라는 보드판에 [다양성 존중]이라고 채워넣었다. 전문화된 한 가지 능력보다 다양하고 복합적인 능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강연이 시작되고 권 의장은 왜 미래 세대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 솔직한 이유를 밝혔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도, 아이들도 행복하지 못한 현 상황에 대한 해법을 찾고 싶다는 의미였다.

일본 남부 시코쿠섬 나고로에서 폐교한 초등학교에 마을 주민들이 아이들 인형을 전시했다.

권 이사장은 일본 남부 시코쿠섬의 한 마을 나고로의 사진으로 말을 시작했다. "뻔한 이야기보다 한 장의 사진을 보여드리고 싶다"던 그는 "아이가 없어 마을 노인들이 아이 인형을 전시했던 사진인데 얼마 후 이게 한국의 모습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이어 권 이사장이 "저도 학부모지만 아이를 키우는게 너무 힘들다. 왜 아이를 낳지 않는지, 얼마나 키우기가 힘든지 다들 알고 계실 것"이라고 말하자 청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우리 회사 직원이 '몇 년째 용돈이 30만원'이라고 한탄했다. 연봉은 오르지만 아이들 교육비로 다 나가고 자기 용돈은 그대로라는 거다. 그랬더니 그의 아내가 하는 말이 '나는 30만원은 커녕 한푼도 안 쓴다'고 답했다고 한다. 고귀한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은 아이도, 부모도 불행한 삶을 살아선 안 된다"고 말을 이어갔다.

권 이사장은 "지금 대한민국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행하고 화가 난 상태"라며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고민해 본 결과 근본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 교육 문제를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자그마치 16년을 공부했는데도 이렇다는 건, 뭔가 교육이 잘못된 게 아닌가 싶다"며 "교육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고도 했다. 이런 고민을 계속했던 권 이사장은 다음 세대의 내일에 관한 일로 눈을 돌렸다. 청년 창업가를 육성하기 위해 인큐베이팅 조직 '오렌지팜'을 만들고 관련 행사에 자주 참석했다.

기업에 필요한 인재가 부족한 현실도 꼬집었다. "학생들은 구직난이라고 하지만, 기업은 구인난"이라며 "회사는 전쟁터 최전방인데 명문대를 나왔다고 해도 문제 해결력이나 조직 적응력은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깊이 있는 창의적 사고를 하며 협업을 잘하는 성숙한 인재를 원하는데, 현재 우리 사회의 교육 환경에서 아이들과 청년들이 사회성과 열정을 키워나가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며 "시스템 속에서 좋은 대학을 나오고 학점이 높은 인재라도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이어 "우리에게 필요한 인재는 사회적 협업능력과 실행능력 두 가지를 갖춘 인재"라며 "비지니스영역에서는 스스로 일을 사랑하고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자기주도적 열정을 갖춘 이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스크래치의 아버지 "코딩은 스킬이 아니라 표현의 수단"

MIT 미첼 레스닉 교수.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미첼 레스닉 교수는 창의적인 아이 교육에 대해서 MIT에서 30년 간 고민한 결과를 설명했다. 4가지 창의 학습의 원칙(4P)인 프로젝트(Project), 열정(Passion), 동료(Peers), 놀이(Play)라는 요소다.

'프로젝트'는 아이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방법을 말한다. 그는 블록형 코딩프로그램 '스크래치'로 꿈을 꾼 내용을 표현한 아비(Abhi)라는 학생을 예로 들었다. "전세계적으로 코딩열풍이 불었지만 대부분 구체적인 기술만 가르쳐 왔다"며 "코딩의 기본은 기술이 아니라 스스로 표현을 위해 생각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단순히 기술만 강조하는 코딩학원 등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두 번째 요소인 '열정'에 대해서는 도전하고, 실패하고, 극복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문제에 부딪치고 난제를 해결하는 경험을 통해 스스로 자신감을 얻고, 세상에 기여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세 번째 원칙 '동료'. 레스닉 교수는 "창의성은 커뮤니티에서 발생한다"고 단언했다. 여러 사람 앞에 자신의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격려받고 의견을 구하면서 창의성이 자라난다는 것이다. 그는 '진호' 라는 학생이 스크래치 커뮤니티에서 5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올랜도 총기 참사 추모 프로젝트'를 협업해 만든 과정을 소개하며 "이런 협업(Collaboration)의 경험이야 말로 자라나는 세대가 점점 잃어가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레스닉 교수가 강조한 부분은 '소통'으로서의 놀이였다. 단순히 활동으로서 놀이가 아니라, 참여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소통적 놀이다. 블록이나 센서, 각종 디바이스 등을 통해 각종 문제에 도전하고 탐험하는 것을 '놀이'로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놀이에서 실패는 없다. 아이들이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도전을 즐겁게 시도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레스닉 교수는 "학교 교육같은 정형화된 교육이 아이의 창의성에 방해가 될 수도 있지만, 그냥 내버려두는 것도 답은 아니다"라며 "농부가 작물을 기르기 위해 토양을 다듬고 양분을 주듯 창의력이 발현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부모와 교육자, 정책결정자들이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MIT가 전세계 100곳 이상 보급한 '컴퓨터 클럽하우스' 같은 공간과 '스크래치' 같은 기술이 자연스레 창의적인 아이를 길러 낼 수 있다는 말이다.

통섭의 과학자 "학교 담 넘듯, 경계 넘나드는 연습해야"

개미 연구와 '통섭(consilience, 통합적 학문)'의 과학자로 유명한 최재천 교수는 동물사회의 창의성 발현을 통해 고민을 풀어냈다. 일본 원숭이 이모(Emo)의 사례를 통해서 유능한 한 동물의 행동을 모방해가며 원숭이 무리 전체가 창의적으로 바뀌는 모습을 설명하는가 하면, 우유병을 따서 마시는 박새의 사례로 다양한 반복적 시도가 창의성으로 연결되는 사례도 언급했다.

최 교수는 "내 아이도 창의성을 위해서라면 (사교육에서) 손을 떼고 싶지만, 다른 아이들보다 한 발 더 먼저 앞서게 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라며 "우리나라 교육과정이 지나치게 길고 복잡하긴 하지만 교육을 그만둘 수 없는 것도 현실"이라고 말해 청중의 공감을 끌어냈다.

23일 판교 스마일게이트 캠퍼스 사옥에서 열린 ‘2019 퓨처랩 미래 교육 콘퍼런스’에서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가 ‘통섭(統攝)’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사진 스마일게이트]

최 교수는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전문 영역으로 쪼개지다 보니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학교 땡땡이를 치고 담을 넘듯이 경계를 넘나들며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를 언급하며 "과학기술과 인문학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아이폰이 탄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 그 또한 융합의 산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해리포터 시리즈와 반지의 제왕, 아바타 같은 영화를 예로 들어 "신화적 요소, 즉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기술의 결합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수 있다. 우리도 삼국유사에서 영화나 게임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문과와 이과로 분리된 한국의 교육에 대해선 '바람직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상상력에 벽을 쳐버렸다는 비판이다. 최 교수는 "내가 통섭을 말할 수 있었던 건 미국 유학 당시 3년간 미시건대 주니어 펠로우로 있으면서 일주일에 한가지 주제로 3년간 200개 주제를 하루종일 토론했던 경험"이라며 "공작은 왜 수컷이 더 아름다운지를 두고 10여 명이 각 학문 분야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대화를 했던 것이 지금도 통섭 논의의 자산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모두 지식의 영토를 조금이라도 확장해야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조언했다.

3가지 키워드 '창의성', '공감', '자기주도'

이날 컨퍼런스는 미래 세대를 위해 필요한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빈 칸으로 두고 시작했다. 컨퍼런스 말미에 청중들이 선택한 3가지 키워드가 공개됐다. 창의성, 공감, 자기주도. 발표 세션 후 진행된 대담에서 권 이사장과 최 교수, 레스닉 교수 모두 이 3가지 키워드에 대해 고개를 끄덕였다.

판교 스마일게이트 캠퍼스 사옥에서 열린 ‘2019 퓨처랩 미래 교육 콘퍼런스’ 행사. 정원엽 기자

자녀 교육에 고민인 학부모들의 진지한 질문도 이어졌다. "현실적으로 좋은 학벌이 중요할 수 밖에 없지 않냐"는 질문이 나오자 권 이사장은 "현재 기업 채용에서 학벌이 고려되긴 하지만 과도기일 뿐"이라며 "학점도 거의 안 보고, (대학을) 중퇴했는 지도 중요하지 않다. 기업이 원하는 능력을 갖췄는 지가 중요하다"고 답했다. 그는 "기업에서 말하는 창의성은 명확히 '문제 해결 능력'이라며,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이야 말로 그 경험을 통해 드라마, 웹툰, 노래 등 매력적인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도 "지금 하버드 학생들도 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는 경향이 있다"며 "빌 게이츠와 마크 저커버그가 명확한 롤모델이 되었듯, 미래에는 학벌이 대단하지 않을 것"이라며 권 의장의 발언에 힘을 보탰다. 그는 "지금의 기준으로 학벌이나 좋은 학교만 자녀에게 강조한다면 20~30년 뒤 세상을 살아갈 다음 세대가 부모를 원망하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레스닉 교수는 학부모들에게 "오늘날 우리는 서로에게 상호 공감하는 감성이 부족하다"며 "아이들이 서로를 경쟁 상대로 보지 않고 동료로 생각하며 공감할 수 있도록 길러 달라"고 당부했다.

정원엽 기자 Jung.wonyeob@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