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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문 닫아" 정주영 회장 식사 후 사라진 이 호텔 중식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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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이준혁의 창업은 정글이다(26)

추운 날씨만큼이나 자영업자의 겨울은 올해도 무척 길 것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힘들다고 아우성인데, 언제 한번 제대로 된 호황이 있었는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주5일 근무, 최저시급제 도입, 근무시간 단축 등 사회 환경의 변화도 경기침체의 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인구수 대비 너무나도 많은 식당수 즉, 수요대비 과잉공급이 제일 큰 문제인 것 같다. 대부분의 식당 점주들은 주방장을 두지 않고 나 홀로 운영을 하는 생계형 창업주들이지만, 본인이 요리를 전혀 못 하고 조리사를 고용해 운영하는 식당도 많다.

인성을 갖춘 조리사들도 많지만, 본인이 없으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약점으로 삼고 주인 위에서 군림하다시피 하는 조리사들도 많은 게 현실이다. 도박하거나 근무 중에 술을 마시거나 심심하면 늦게 나오거나 결근을 하는데도 조리사에게 모든 걸 맡기고 그들에게 끌려다니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 불안에 떨며 식당을 운영하는 경우를 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25년 전 특급호텔 식음 과장으로 근무할 때, 오너인 정주영 명예회장이 주관하는 한·일 전경련 회장단 행사가 열렸다. 한 달 전부터 메뉴를 짜고 리허설을 하는 등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준비했다. [사진 pixnio]

25년 전 특급호텔 식음 과장으로 근무할 때, 오너인 정주영 명예회장이 주관하는 한·일 전경련 회장단 행사가 열렸다. 한 달 전부터 메뉴를 짜고 리허설을 하는 등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준비했다. [사진 pixnio]

25년 전 경주에 있는 특급호텔에 식음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호텔 오너인 정주영 명예회장이 주관하는 한·일 전경련 회장단 행사가 호텔에서 열릴 예정이라 호텔은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 전·현직 총리급 고위인사와 양국의 그룹회장단만 수십명 참석하는 행사로 한 달 전부터 메뉴를 짜고 리허설을 하는 등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준비했다.

당시 호텔에는 여러 유형의 식당들이 있었지만 정주영 회장이 중식을 특별히 선호하고, 호텔 중식당 주방장이 서울에서 제일 유명한 중식당 셰프를 역임한 최고의 조리장이었기에 만찬 메뉴로 중국 음식이 선정됐다. 제비집 수프, 삭스핀 찜, 불도장 등 최고의 요리 코스를 준비해 테이블 위에 메뉴판도 세팅하고 내빈을 맞이할 준비를 끝냈다.

첫 번째 코스인 오색냉채가 나가고 두 번째 코스인 제비집 수프가 무사히 나가고 세 번째 코스인 자연산 송이 전복요리를 서빙하려고 주방에 들어가니 눈앞에는 한참 시끄럽게 정신없이 요리하고 있어야 할 조리사들이 아무도 없었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주방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떨고 있는 설거지 아줌마에게 “이 사람들 전부 어디 갔어요” 하니 모깃소리로 “몰라예, 전부 도망갔어예” 하는 것이 아닌가.

깊은 탄식을 하고 뒤를 돌아보니 호텔 사장과 총지배인은 모두 주방 바닥에 주저앉아있고, 얼굴은 파랗게 질려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내가 중식 조리사도 아닌데 왜 나만 쳐다보지” 하면서도 마치 이런 사태를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입으로는 연방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전원 각 테이블에 있는 메뉴판을 치울 것, 테이블 위에 포크와 나이프를 두 개씩 세팅할 것, 테이블에 깔린 양파와 짜사이, 춘장 등 중식 기본 찬을 전부 뺄 것을 지시했다. 또 한식, 일식, 양식 주방에 긴급히 연락해 각 주방에서 미리 준비한 음식을 신속히 메인 주방으로 가져올 것을 하달했다. 각 주방에서 도착한 다양한 음식들은 한 테이블 정원인 8인분씩 소분해 무조건 서빙했는데, 어떤 테이블은 복튀김을 먹고 어떤 테이블은 미니 스테이크를 먹고 어떤 테이블은 불고기를 먹고 완전 다국적 연회가 시작됐다.

모두 최고의 귀빈들이라 남의 테이블에 뭘 먹는지는 관심조차 없었기에 뒤죽박죽 음식으로 무사히 만찬이 끝났다. 간혹 메뉴판을 초기에 본 사람 중 일부가 짜장면은 언제 나오냐고 묻기도 했지만, 만면에 웃음을 띠고 더 좋은 음식으로 준비했노라고 말하며 무시를 해버렸다. 행사가 다 끝나고 정주영 회장이 나에게 물었다. “오늘 중식 아냐” 그 순간 거짓말을 하면 진짜 전부 죽기 때문에 곁에서 떨고 있던 호텔 사장과 총지배인을 마치 지옥에서 구해 주기라도 하듯 “전부 도망갔습니다”라고 말하니 회장님은 “왜, 도망갔어”라고 하는 게 아닌가.

식당 운영자는 음식을 고용조리사에게 맡기더라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주방장에게 휘둘리면 안 된다. 그들에게 끌려다니면 들쑥날쑥한 음식으로 인해 손님들이 먼저 알고 식당을 떠나게 되어 있다. [사진 pxhere]

식당 운영자는 음식을 고용조리사에게 맡기더라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주방장에게 휘둘리면 안 된다. 그들에게 끌려다니면 들쑥날쑥한 음식으로 인해 손님들이 먼저 알고 식당을 떠나게 되어 있다. [사진 pxhere]

월급을 일 년에 4번씩 올려달라고 해 요구를 거절했더니 오늘 디데이를 잡고 골탕을 먹인 것이라 얘기했다. 며칠 전부터 이상한 조짐이 보여 만약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것을 대비해서 한식, 일식, 양식당에 만찬 인원에 맞게 다른 음식 재료를 준비해 비록 메뉴는 모두 다르지만 그래도 밥은 먹였노라고 설명했다. 정 회장은 단칼에 “오늘부터 중식당 문 닫아” 하며 자리를 떴다. 경주에 있던 그 호텔은 특급임에도 불구하고 2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중식당이 없다.

지금은 에피소드로 웃어넘기는 25년 전 기억을 회생한 것은 이런 일들이 오늘날 외식업계에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식당 운영자 본인이 자신의 식당에서 팔고 있는 메뉴를 전부 만들 줄 알면 금상첨화지만, 부득이 음식을 고용조리사에게 맡기더라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주방장에게 휘둘리면 안 된다. 계속해서 사정하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끌려다니면 무엇보다 들쑥날쑥한 음식으로 인해 손님들이 먼저 알고 불안해하며 식당을 떠나게 되어 있다.

골탕을 먹이고 비이성적으로 근무하는 조리사들이 있으면 미리 대비책을 만들어놓고 전격적으로 매장을 닫고 새로 재정비해 오픈해야 한다. 보름을 닫는 한이 있어도 한번 버릇이 나쁘게 박힌 그들을 데리고 매장을 끌고 가는 것은 깨진 독에 물 붓기다. 서비스업은 신바람이 나야 손님도 덩달아 찾아온다.

주인과 고용인이 신뢰가 깨져 끊임없이 요구하고 이용하는 그런 관계 속에선 이미 폐업을 예약하는 거나 다름없다. 제일 중요한 것은 힘들다 생각하지 말고 최소한 자기 집에서 팔고 있는 음식은 본인이 만들어 손님상에 내어놓을 수 있도록 본인이 요리를 배우고 터득하는 것이다. 그런 가게가 노포식당이 된다.

(사)한국공유정책 일자리 위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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