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촌 이산가족의 눈물…아웅산 수찌가 발뺌한 로힝야 탄압의 증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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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동남부 콕스바자르 주의 우키아에 있는 쿠투팔롱 난민촌은 거대했다. 지난달 현장을 찾았던 그곳은 가도 가도 산등성이와 들판, 그리고 개울 사이로 대나무와 비닐을 얽어 만든 임시 거처가 줄을 이었다.

그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미얀마에서 넘어온 로힝야 인들이 거주하는 쿠투팔롱 난민촌은 지난 9월 15일 거주자가 61만3272명으로 세계 최대의 난민촌이 됐다. 2017년 10월 54만7616명으로 집계한 것과 비교하면 12%가 늘었다. 미얀마에서 ‘라카인 이탈자’로 부르는 로힝야 인들이 계속 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시로 오고 있다는 이야기다. 난민촌 인구 증가는 미얀마에서 로힝야 박해가 그치지 않는다는 살아있는 증거다.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뱃속서 국경 넘어 난민촌 출생 아이 #이름 지어줄 아빠는 미얀마 감옥에 #ICRC 도움으로 이산가족 찾았더니 #징역 30년 장기형 선고받고 복역 중 #난민 아이들, 썩어가는 개울 옆에서 #악취 맡으며 우루루 뛰어놀지만 #그래도 교육은 해야 한다며 열성 #난민촌에도 등하교길은 복잡해 #민주화로 고위공직 맡은 수치 #국제사법재판소서 변명으로 일관

60만 명이 넘는 로힝야 난민이 임시 기거하는 쿠루팔롱 난민촌의 모습. 개천에 쓰레기가 쌓여 악취가 진동을 했다. [채인택 기자]

60만 명이 넘는 로힝야 난민이 임시 기거하는 쿠루팔롱 난민촌의 모습. 개천에 쓰레기가 쌓여 악취가 진동을 했다. [채인택 기자]

오수 흐르는 개천에선 악취 진동   

지난달 찾았던 쿠루팔롱 난민촌에선 로힝야 인들의 비극적인 모습을 여럿 목격할 수 있었다. 쓰레기가 쌓여 오수가 흐르고 악취가 진동하는 개울 옆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그 사이로 암탉이 병아리들과 함께 모이를 찾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국제인도주의 기구가 제공하는 배급 식량과 생필품으로 간신히 삶은 이어가는 상황이었다. 난민촌 내부의 환경 문제는 심각해 보였다.

전통 투피 모자를 쓴 로힝야 학생(오른쪽)이 쿠루팔롱 난민촌 도로를 지나고 있다. [채인택 기자]

전통 투피 모자를 쓴 로힝야 학생(오른쪽)이 쿠루팔롱 난민촌 도로를 지나고 있다. [채인택 기자]

전통의 투피 모자 쓴 남학생들 많아져  

그래도 지난해 처음 찾았을 때보다는 안정된 모습이었다. 지난해 찾아갔던 임시 학교에선 학생들이 아무 옷이나 입고 와선 빽빽하게 앉아 하디스(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경전)와 영어, 미얀마어, 산수를 배우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대부분 히잡을 썼지만, 남학생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맨머리 상태였다. 황급히 국경을 넘느라 생필품을 제대로 챙겨오지 못한 데다 형편이 어려워 살 형편도 되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남학생은 대부분 투피로 불리는 현지 무슬림(이슬람 신자) 남자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교복 차림도 간간이 보였다. 일부 학생은 색칠 놀이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기도 했고, 과학과 관련한 내용이 담긴 책을 들고 다니는 학생도 있었다. 교육이 어느 정도 정상화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등하교 시간에는 난민촌 좁은 도로가 붐볐다. 난민촌에서 교육의 열정은 살아있었다. 아이들이 미래의 희망이니까.

쿠루팔롱 로힝야 난민촌의 학교 표지. [채인택 기자]

쿠루팔롱 로힝야 난민촌의 학교 표지. [채인택 기자]

불법거래 막기 위해 인터넷은 차단

시장도 안정된 상태였다. 지난해에는 시장에 들어선 가게가 대부분 노점이었고, 파는 물건도 국제인도주의 기구에서 나온 의약품이나 건강식품이 많았다. 하지만 올해에는 방글라데시 현지인들의 가게처럼 차도 만들어주고 과자와 청량음료를 팔면서 식용유나 설탕, 세제 같은 생활용품도 파는 ‘티 하우스’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가게의 정상화도 이뤄지고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냉장고를 쓸 수 없음에도 정육점이 여러 군데 보였다. 집집마다 지붕에 태양열 발전기를 얹어두고 있었으며 휴대전화를 든 사람도 많이 보였다. 다만 불법 거래를 막기 위해 방글라데시 당국이 난민촌 내에서 데이터 통신을 차단해 인터넷은 되지 않았다.

쿠루팔롱 난민촌에 살고 있는 로힝야 인인 샤마루(가운데)와 그의 아들인 오마르 샤데크(안겨 있는 아이)와 현제자매들' 샤마루의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인 오마르 샤데크는 미얀마에서 체포돼 30년 형을 받고 복역 중이다. 국경을 넘어온 뒤 태어난 아들은 이름을 지어주겠다는 아버지가 감옥에 있어 자기 이름 없이 아빠의 이름으로 불린다. [채인택 기자]

쿠루팔롱 난민촌에 살고 있는 로힝야 인인 샤마루(가운데)와 그의 아들인 오마르 샤데크(안겨 있는 아이)와 현제자매들' 샤마루의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인 오마르 샤데크는 미얀마에서 체포돼 30년 형을 받고 복역 중이다. 국경을 넘어온 뒤 태어난 아들은 이름을 지어주겠다는 아버지가 감옥에 있어 자기 이름 없이 아빠의 이름으로 불린다. [채인택 기자]

뱃속에서 아버지와 헤어진 2살 어린이

이런 개울과 마을, 시장을 지나 좁은 난민촌 골목길을 한참 걸어서야 오마르 샤다크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2살 먹은 남자아이인 오마르 샤다크는 엄마 샤마루와 함께 어두운 집에서 살고 있었다. 사실 오마르 샤다크는 아이의 이름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이름이다. 왜 자신의 이름이 없이 그 이름으로 불릴까. 엄마인 샤마루에게 이유를 물었다. 샤마루는 “아이가 배 속에 있을 때 아이 아빠가 이름을 이렇게 짓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잊어버렸다”며 “그런데 아이 아빠가 미얀마에서 체포되면서 헤어져 이곳에서 출산한 아이의 이름을 여태 짓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2년 전의 일이다. 아이는 2년간 이름 없이 살고 있으며, 샤마루는 2년간 남편의 행방은 물론 생사조차 모르고 살았다.

아빠는 미얀마에서 30년형 받고 감옥에

샤마루의 어머니 로숌은 여장부였다. 로숌은 사위의 행방을 찾아달라고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현지 직원을 만나 부탁했다. ICRC는 난민촌에서 이산가족 찾기 사업을 오랫동안 해왔으며 쿠투팔롱에서도 이 사업을 펴고 있다. 로숌의 사람 찾기 신청을 받은 현지 ICRC는 미얀마 적십자사에 행방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미얀마 적십자사는 방글라데시 적신월사(이슬람국가에서 적십자사와 같은 활동을 하는 조직)에 지난달 아이 아빠인 오마르 샤다크의 행방을 알려왔다.
다행히 그는 살아있었다. 하지만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무슨 죄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곧 오마르 샤다크의 편지도 도착했다. 감옥에서 지내고 있는데 재판에서 30년형을 받았다는 내용이 남겼다. 이산가족 재회의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쿠루팔롱 난민촌에서 로힝야 인들을 대상으로 이산가족 찾기 사업을 벌이는 방글라데시 적신월사 자원봉사자(왼쪽)의 모습.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와 함께 활동한다. [채인택 기자]

쿠루팔롱 난민촌에서 로힝야 인들을 대상으로 이산가족 찾기 사업을 벌이는 방글라데시 적신월사 자원봉사자(왼쪽)의 모습.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와 함께 활동한다. [채인택 기자]

그나마 생사라도 확인해 심리적 안정

억장이 무너진 샤마루는 남편의 감형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아이 이름을 지어서 보내 달라고 편지로 부탁하고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샤마루의 아들은 계속 아빠 이름인 오마르 샤다크로 불리고 있었다.
ICRC 현장 활동가로, 이산가족 연결 담당인 샤루크 호사인 탈룩데르는 “그나마 생사 확인이라도 되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산가족을 찾아 재회할 수 있으면 최상이겠지만, 생사 여부를 알고 편지 연락이라도 하면 심리적인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패 하루하루 절망 속에 사는 가족이 더욱 많다는 이야기다.

쿠루팔롱 난민촌의 로힝야 사람들 시장의 모습. [채인택 기자]

쿠루팔롱 난민촌의 로힝야 사람들 시장의 모습. [채인택 기자]

국경 넘을 때의 트라우마

다시 산길을 걸어 찾아간 7세 소녀 사모나의 집. 사모나는 ICRC의 물리치료사로 재활 담당자인 카지 임다둘 호크가 수시로 찾아 관리하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발이 휜 사모나가 미얀마에서 국경을 넘으면서 다리를 다쳐 한참동안 걷지도 움직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난민촌에서 장애인 재활 사업을 펴던 카지가 보조기구를 채워주고 재활 치료를 도와주면서 사모나는 걸을 수 있게 됐다. 한해 늦었지만 내년에는 학교에 입학할 예정이다.
난민촌의 좁은 길을 다니는데 한 소년이 계속 따라왔다. 무함마드라는 이름의 12살 소년이었다. 난민촌에서 활동하는 국제인도주의 기구 직원을 따라다니면서 영어를 배워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미얀마의 농촌에서 살았던 그는 국경을 넘어오면서 가족과 헤어졌다.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도, 살아있는지도 알 수 없다고 했다. 꿈에 총소리가 계속 들리고 집이 불탈 때 났던 냄새도 난다고 했다. 심리적인 트라우마 증세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물었지만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괴로운 기억 속에서 말하기가 힘든 게 아닌가 싶었다. 괜히 질문을 해서 힘든 기억을 반추하게 한 건 아닌지 후회스러웠다. 쿠투팔롱 난민촌은 안정을 찾고 있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비극은 계속되고 있었다.

미얀마의 국가고문이자 외교부 장관인 아웅산 수찌가 12월 10일 국제사법재판소릃 나서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얀마의 국가고문이자 외교부 장관인 아웅산 수찌가 12월 10일 국제사법재판소릃 나서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얀마의 아웅산 수찌, 책임 회피  

이들은 로힝야인들이 미얀마에서 탄압을 받았다는 살아있는 증거다. 쿠투팔롱 난민촌에 사는 60만 명이 넘는 집 잃은 난민 모두가 증인이다. 그런데도 지난 12일, 너무도 황당한 소리가 들려왔다.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미얀마의 아웅산 수찌 국가고문 겸 외무부 장관은 이날 시종일관 로힝야 주민 박해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날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열린 로힝야 집단학살 재판의 최종 심리에서 수찌 고문은 미얀마 정부와 군의 학살 혐의를 부인했다.

12월 11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 법정에서 진술하는 아웅산 수찌 미얀마 국가고문.[AP=연합뉴스]

12월 11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 법정에서 진술하는 아웅산 수찌 미얀마 국가고문.[AP=연합뉴스]

수찌 고문은 최후 진술에서 “2016~2017년 라카인(미얀마 서부로 로힝야인 밀집 거주지역)에서 발생한 내부 무력 충돌의 재발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당시 충돌 과정에서 국제인도법 위반이 있었다 하더라도 집단학살 수준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재판부에 “미얀마 사법부에 기회를 줘야 한다”며 사건 기각을 요청했다.
이날 수찌는 벤츠 차량에 탑승하고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 당당하게 ICJ 건물에 들어갔다. ICJ 주변에선 일부 인권단체 관계자와 로힝야 인들이 항의시위를 벌였다.

불교 승려가 12월 10일 미얀마의 만달레이에서 열린 아웅산 수찌 지지 집회에서 지지구호가 적힌 사진을 들고 있다. [EPA=연합뉴스]

불교 승려가 12월 10일 미얀마의 만달레이에서 열린 아웅산 수찌 지지 집회에서 지지구호가 적힌 사진을 들고 있다. [EPA=연합뉴스]

‘불교국가의 무슬림 탄압’ 감비아, 미얀마 제소

이번 재판은 서아프리카의 감비아가 무슬림(이슬람 신자)인 로힝야인이 불교국가인 미얀마에서 인종청소 대상이 됐다며 이슬람협력기구(OIC)를 대표해 지난달 미얀마를 집단학살 혐의로 ICJ에 제소하면서 이뤄졌다. 감비아는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한 임시 조치를 명령해줄 것도 요청했다.

미얀마를 인종할살 혐의로 제소한 감비아의 아부바카르 탐부두 외교부 장관이 11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AP=연합뉴스]

미얀마를 인종할살 혐의로 제소한 감비아의 아부바카르 탐부두 외교부 장관이 11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AP=연합뉴스]

재판의 원고 격인 감비아는 면적이 1만689㎢로 경기도(1만171㎢)와 비슷하며 국제통화기금(IMF) 2018년 통계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명목금액 기준으로 745달러의 가난한 나라다. 인구 약 200만 명에 전체 인구의 95%가 무슬림이지만 헌법에 따라 어떤 종교도 자유를 보장한다. 재판의 피고 격인 미얀마는 면적이 67만6578㎢로 한반도의 3배에 이르며 국제통화기금(IMF) 2018년 통계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명목금액 기준으로 1298달러의 역시 가난한 나라다. 인구 5358만 명에 2014년 통계로 불교 87.9%, 기독교 6.2%, 이슬람 4.3%로 나타났다. 무슬림은 대부분 동부 라카인 주에 거주한 로힝야인이다.

12월 12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평화궁 앞에서 한 남자가 미얀마 제품 불매 운동을 호소하는 플랭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12월 12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평화궁 앞에서 한 남자가 미얀마 제품 불매 운동을 호소하는 플랭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4만 이상 희생설 속 타락 천사가 된 수찌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가로 1991년 그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아웅산 수찌는 2016년 3월 국가고문과 외무부 장관에 올랐다. 투쟁의 성과와 군사정권과의 타협이 결합한 결과였다.

아웅산 수찌 미얀마 국가고문 겸 외교부 장관.[AP=연합뉴스]

아웅산 수찌 미얀마 국가고문 겸 외교부 장관.[AP=연합뉴스]

하지만 수찌는 미얀마 정부와 군의 로힝야인 박해와 살해, 그리고 추방 사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국제사회의 비판을 한몸에 받으면서 ‘타락 천사’ 신세가 됐다.

미얀마 정부의 서부 라카인 주 로힝야 주민에 대한 압박은 2016년 10월~2017년 1월의 1차 박해와 2017년 8월 이후의 2차 박해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라디오 자유아시아와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의 보도 등에 따르면 1차 박해 당시에는 미얀마 내에서 약 1만 명의 로힝야인이 숨졌다. 캐나다의 정부기구인 온타리오 국제개발기구와 카타르에 본부를 둔 알자지라 방송 등에 따르면 2차 박해에 따른 희생자는 약 2만4000명에 이른다. 2차 박해 때는 로힝야 주민들의 대대적인 국외 탈출도 함께 이뤄져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70만 명 이상이 이웃 방글라데시나 태국 등지로 강제로 옮기거나 박해를 피해 피신했다.

미얀마 여성이 12월 10일 이 나라 최대 도시인 양곤에서 아웅산 수찌를 지지하는 사위에 참가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얀마 여성이 12월 10일 이 나라 최대 도시인 양곤에서 아웅산 수찌를 지지하는 사위에 참가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얀마, 불교도만의 다민족 국가 추구

5358만 인구의 미얀마는 버마족(68%)·샨족(9%)·카렌족(7%)·라카인족(4%)·몬족(2%)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135개 민족으로 이뤄진 다민족국가다. 하지만 로힝야인은 소수민족에도 들지 않는다. 1982년 군부가 만든 국적법에서 국민 기준을 영국 통치 이전부터 거주한 민족으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인도 동부 벵갈 지역에서 건너온 이민자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이들은 국민에서 제외되고 추방해야 할 '식민 잔재'로 분류됐다. 하지만 로힝야족은 자신들이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의 토착민족이라고 주장한다. 군사정권 이전엔 선거에도 참가했다.

한 소녀가 12월 1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평화궁 앞에서 로힝야 인종학살을 멈추라는 구호가 적힌 플랭카드를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한 소녀가 12월 1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평화궁 앞에서 로힝야 인종학살을 멈추라는 구호가 적힌 플랭카드를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로힝야 탄압, 불교사회주의 군사정부 잔재

불교국가 미얀마의 무슬림 탄압 기원은 1962년 쿠데타로 집권해 1988년까지 지배했던 군부독재자 네윈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네윈은 버마족과 불교를 우선하는 ‘버마식 사회주의’ ‘불교 사회주의’를 국정철학으로 내세웠다. 일당독재, 외국인 추방, 해외관광객 사절, 대외교역 단절, 엄격한 고립과 쇄국주의, 산업 국유화, 소수민족 억압 등이 포함된 그의 정책은 민주주의·인권 억압과 경제파탄을 불렀다. 군사정권은 1978년 로힝야인을 외국인이라 부르며 20만 명을 강제로 이웃 방글라데시로 밀어냈다. 1991~92년엔 25만 이상이 다시 쫓겨났다.
결국 로힝야 탄압은 결국 군부독재의 잔재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로힝야 인이 무장해서 저항하자. 미얀마 정부는 민주화 운동가인 아웅산 수찌가 집권한 상황에서도 대대적인 로힝야 인 탄압에 들어갔다.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 인을 소수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이들은 로힝야족 대신 ‘라카인 이탈자’로 부르며 국제기구에도 이를 요구할 정도다. 종교나 생각이 같이 않다고 같은 국민으로 여기지 않고 적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반인도주의적인 행위다. 이런 일이 용납되는 이상 로힝야 문제 해결은 요원할 뿐이다. 어린 오마르 샤데크와 사모라의 비극은 언제나 끝날 수 있을까.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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