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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전도 무소용…조선이 임란에 당한 건 나태한 정치 때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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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연석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교수가 26일 오후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에 전시 중인 본인이 복원한 총통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채연석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교수가 26일 오후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에 전시 중인 본인이 복원한 총통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세종시 연동면 내판리 옛 연흥초등학교 건물. 1999년 폐교가 된 이후 이 지역의 한 중소기업이 사용하고 있는 낡은 학교 건물 1층 교실에 총통완구와 장군화통 등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조선 세종시대 무기 20여 점과 각종 기계장비ㆍ종이박스 등이 가득하다. 벽에는 2008년 복원ㆍ발사에 성공한 대신기전 현장 사진이 걸려있다. 이곳은 올해 68세의 한 원로 과학자의 정신세계가 구현되고 저장되는 공간이다. 그는 대전의 집과 연구실에서 구상ㆍ설계ㆍ제작한 물건을 이곳에 보관하고 있었다.

채연석 항공우주연구원 전 원장 #조선시대 첨단 무기 복원에 몰두 #"지금껏 복원된 거북선은 엉터리" #초등시절 미·소 경쟁 보고 꿈 키워 #미 영화 '옥토버스카이'의 한국판 #

원로 과학자의 이름은 채연석(68).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제6대(2002~2005) 원장을 지냈다. 한국 최초로 액체로켓을 개발하고 오늘날 한국형 발사체 개발의 터를 닦은 1세대 로켓 과학자이지만, 지금은 전통무기 연구자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일반인들에겐 조선시대 최대 길이 5.21m짜리 로켓포인‘신기전(神機箭)’을 복원한 인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대전엑스포가 열리던 1993년 왕조실록 등 고서 속의 활자와 그림으로만 남아있던 중ㆍ소 신기전과 그 발사대인 화차(火車)를 최초로 복원했다.

2008년 개봉한 영화 신기전. 채연석 전 항우연 원장이 최초 복원한 조선시대 로켓 무기 신기전을 소재로 만들었다.

2008년 개봉한 영화 신기전. 채연석 전 항우연 원장이 최초 복원한 조선시대 로켓 무기 신기전을 소재로 만들었다.

그렇게 복원된 신기전은 2008년 같은 이름으로 영화화해 개봉 2주만에 관객 200만명을 넘어서는 흥행을 낳기도 했다. 영화 말미에 마치 대륙간탄도탄처럼 땅에서 화염을 내뿜고 치솟아 오른 대신기전이 북방 여진족들을 한 방에 물리치는 장면에 수많은 관객들이 환호성을 지른 그 영화 말이다. 허구가 아니다. 실제로 세종시절 조선은 신기전으로 북방민족들을 몰아내고 4군6진을 개척, 오늘날의 한반도 경계를 지켜냈다. 활과 칼로만 무장했던 여진족들은 조선 로켓포의 위력 앞에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채 전 원장은 지난달 19일 역사 속에 묻혀있는 또 하나의 조선시대 비밀병기 ‘진천뢰(震天雷)’에 대한 설계도를 처음으로 복원ㆍ공개했다. 진천뢰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최초 시한폭탄격이었던 ‘비격진천뢰’와 함께 왜군을 물리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폭탄이었다. 하지만 제조법이 일급비밀로 취급되면서 기록이 사라졌고, 지금까지 출토된 적도 없어 구조와 모습ㆍ특징이 알려지지 않았다.

채연석 전 항우연 원장이 복원 설계한 거북선 모형.

채연석 전 항우연 원장이 복원 설계한 거북선 모형.

진천뢰는 1635년 편찬된 화약무기 전문서‘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에 ‘진천뢰는 대완구(大碗口)로 발사했고, 비격진천뢰는 중완구를 이용했다’는 문구로 등장한다. 대략적인 제원도‘진천뢰의 무게는 117근2냥(70.2㎏)…화약은 5근(3㎏), 능철(마름쇠)은 30개를 넣는다’는 설명으로 나온다. 채 교수는 진천뢰를 쏘아올린 대완구가 세종대왕 때 개발됐던 총통완구와 크기가 같았다는 점을 고려해 진천뢰 설계도를 만들었다. 완구란 포탄을 넣어 쏘는 화포(火砲)를 말한다. 화포 직경의 크기에 따라 대완구ㆍ중완구 등으로 구분했다.

그의 추정에 따르면 진천뢰는 지름이 농구공과 비슷한 33㎝, 폭발력은 비격진천뢰의 5배에 달하는 거대 시한폭탄이었다.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 의병대장 김해가 쓴 향병일기에도 “왜적을 토벌하는 계책으로 진천뢰보다 더 나은 것은 없었다”고 적혀있다.

거북선의 역사. 세월이 흐를수록 거북선의 규모가 커졌다. 채연석 전 항우연 원장 제공

거북선의 역사. 세월이 흐를수록 거북선의 규모가 커졌다. 채연석 전 항우연 원장 제공

채 전 원장은 “비격진천뢰 유물은 많이 발견됐지만, 진천뢰나 진천뢰를 발사한 대완구 유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며“역사 속 기록물을 토대로 조선이 독자개발한 진천뢰의 성능을 확인한 첫 연구‘라고 의의를 밝혔다.

그의 다음 프로젝트는 거북선의 완벽한 실물 복원이다. 지금까지 복원된 여러 거북선은 겉모습에만 치우쳤을 뿐, 왜구들을 떨게 했던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해군 무기체계를 재현하지는 못한 엉터리였다는 게 그의 평가다. 그는“그동안 복원된 거북선들은 노를 저어 움직일 수 있는 것도, 함포를 발사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단지 물에 뜨는 모형으로서만 있을 뿐”이라며“내년 봄 경기도 파주시와 함께‘진짜 거북선’을 임진강에 띄울 예정”이라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나타난 거북선은 임진왜란(1592~1598년) 당시가 아니다. 조선 초인 1413년 태종이 세자와 함께 임진도(임진나루) 근처에서 거북선과 왜선이 싸우는 것을 가정한 훈련을 구경한 데 이어 2년 뒤인 1415년 왜선을 격퇴할 수 있는 튼튼한 거북선 제작을 지시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거북선은 조선 역사와 함께 진화했다. 임진강 거북선의 길이는 12~14m 정도의 2층 구조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길이 35m 이상에 3층 구조로 커졌다. 1층은 선창, 2층은 노를 젓는 공간과 함께 250~300㎏의 천자총통 2개가 전면에 배치됐다. 3층에는 전면에 지자총통 2대, 옆면을 따라 양쪽에 6개씩 황자총통 12개가 설치됐다. 용머리에도 현자총통 1대가, 3층 선미에도 현자총통 2대가 배치되는 등 19대의 화포가 무장됐다.

채 전 원장은 ‘신에게는 아직 열두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라고 말한 이순신 장군에게는 뛰어난 전술 외에도 거북선에 대한 막강한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고 말한다. 그가 분석한 거북선은 당대 최고의 무적함대였다. 왜 수군 깊숙이 거북선이 들어가 앞과 옆 뒤의 화포 19문을 동시에 발사하면 조총과 활ㆍ칼로만 무장한 왜군의 배는 대항조차 못하고 수장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채 전 원장이 지금까지 고서 연구를 통해 복원한 조선시대 무기는 총 50종에 이른다.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에 가면 신기전과 각종 총통 등 그가 평생을 쏟아 복원한 옛 무기들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조선의 강토는 그렇게 뛰어난 무기를 가지고도 왜 그렇게 왜군에 속수무책으로 유린 당했을까. 동래성을 함락한 왜군은 8일 만에 한양에 무혈입성했다. 하루 30㎞의 진격 속도였다. 임금 선조는 경복궁을 버리고 신하들과 의주로 달아났다. 백성은 한양을 버린 임금에 분노해 궁궐에 불을 질렀다.

채 전 원장은 “동래성에서 천자포만 제대로 활용했으면 왜군이 부산을 넘어서지도 못했을 것”이라며“당시에도 뛰어난 무기생산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언제든 쓸 수 있는 무기로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왜군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조선 수군(水軍)은 달랐다. 1552년 조총으로 무장한 왜구가 쳐들어와 전남 완도가 쑥대밭이 된 적이 있었다. 이후 정걸 장군(1514~1597)이 이끄는 수군이 화포와 전함을 대폭 정비한다. 이어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에 취임, 정걸 장군의 본을 받아 거북선을 건조하고 당대 최고 수군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채 전 원장은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든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라며 “당시 조선의 정치는 전국적인 국방체계를 갖출 수 없을 만큼 나태해 있었다”고 말했다.

정부 출연연의 로켓 과학자가 왜 옛 전통무기 복원에 힘을 쏟고 있을까. 그는 미국 성장영화 ‘옥토버스카이’(1999)의 한국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이력을 지녔다. 영화 속 주인공은 1950년대 미국 탄광촌에 살던 한 소년이다. 소련의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의 발사성공에 대한 뉴스를 듣고 로켓 과학기술자의 꿈을 키운다. 탄광에서 일하던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로켓을 개발하다 산불 누명을 쓰기도 했지만, 연구를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미국 과학경진대회 우승과 대학 입학의 꿈까지 이뤄낸다. 이 영화는 미국 항공우주연구원(NASA)의 엔지니어 호머 히컴의 실제 학생 시절을 그린 작품이기도 하다.

채 전 원장이 로켓 개발의 꿈을 키운 것도 옥토버스카이의 시절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60년대 초 초등학교 4학년 시절 학교 게시판에 걸려있던 외신이 그의 마음에 로켓의 씨를 뿌렸다. 미국과 소련이 우주로켓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소년은 그때부터 도서관에서 로켓과 관련한 책은 모두 찾아 읽었다. 고교 1년 땐 운동장에서 화약을 이용해 로켓 실험을 하다 폭발사고가 나 고막을 다치기도 했다. 하지만 소년은 옥토버스카이의 주인공처럼 포기하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에서는 조선왕조실록 속 신기전이 로켓이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고서적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의 꿈은 과거와 미래로 동시에 뻗어나갔다. 경희대 물리학과 학부와 기계공학 석사에 이어 미시시피주립대 항공우주공학과 석ㆍ박사 과정을 거친 것은 그런 그의 세밀한 인생설계였다. 물리학으로 기초를 쌓고, 기계공학으로 엔지니어링을 익힌 뒤 본격적으로 우주로켓 개발에 뛰어들겠다는 계산이었다. 1987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이듬해 항공우주연구원에 입사해 우주로켓 개발자로서 본격적인 경력을 쌓았다.

채 전 원장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건강이 허락하는 한 우리 선조의 뛰어났던 국방과학 무기를 세상에 알리는데 여생을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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