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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례식 준비 즐겁다" 루게릭병 걸린 33살 아빠의 투병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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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아이 엠 브리딩'은 33살에 루게릭병을 진단 받은 영국 건축가 닐 플랫이 갓 돌이 지난 아들 오스카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담았다. [사진 독포레스트]

다큐멘터리 '아이 엠 브리딩'은 33살에 루게릭병을 진단 받은 영국 건축가 닐 플랫이 갓 돌이 지난 아들 오스카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담았다. [사진 독포레스트]

해변의 젖은 모래를 아이의 작은 발이 밟는다. 바람을 느끼는 누군가의 얼굴. 생의 감각을 극대화한 듯한 장면에 흰 컴퓨터 화면이 이어진다. 누군가가 부르는 대로 글자가 박힌다.

“저는 닐입니다. 8개월 전 33살 나이로 루게릭병을 진단받았어요. 조금 화나고 끔찍하긴 해도 재밌고 즐거운 이야기죠.”

루게릭병. 근육이 서서히 위축하다 2~3년 안에 대부분 사망에 이르는 불치병이다. 아직 명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을 쓰러트렸고 전 농구코치 박승일씨가 “살아있는 지옥”이라 했던 그 병이다. 움직이지 못할 뿐, 모든 감각은 살아있어, 마비돼가는 몸 안에 영혼이 갇힌 듯한 기분을 느껴서다.

19일 개봉 다큐 '아이 엠 브리딩' #루게릭병 선고받은 영국 건축가의 #전 세계를 웃기고 울린 투병기

루게릭병 선고받은 33살 아빠

닐 플랫이 산악여행과 오토바이를 즐기던 시절의 모습이다. [사진 독포레스트]

닐 플랫이 산악여행과 오토바이를 즐기던 시절의 모습이다. [사진 독포레스트]

이런 고통스런 투병기를 ‘조금 화나고 끔찍하긴 해도 재밌고 즐거운 이야기’라 말한 사람. 서른세 살의 영국 건축가 닐 플랫이다. 첫 아이가 태어나 아빠가 된지 불과 몇 달 만에 그는 루게릭병을 진단받았다. 그러나 타고난 유머감각을 조금도 잃지 않고, 살아온 시간 그대로 마지막 순간까지 있는 힘껏 삶을 누렸다.
시한부 선고받은 2008년부터 가족‧지인에 근황을 전하려 시작한 그의 블로그(The Plattitude, 한국어로 번역된 글을 www.iambreathing.kr에서 볼 수 있다)는 7개월 만에 전세계 1만여명 사람이 찾아오고 언론에 보도되며 루게릭병을 이해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33세에 갑자기 발병한 후 불과 1년여 만에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유머감각과 삶의 철학은 더 깊어졌다. [사진 닐 플랫 블로그]

33세에 갑자기 발병한 후 불과 1년여 만에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유머감각과 삶의 철학은 더 깊어졌다. [사진 닐 플랫 블로그]

19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아이 엠 브리딩’(감독 엠마 데이비‧모라그맥키넌)은 닐의 이런 이야기를 담았다. 당사자가 아니면 결코 알 수 없을 루게릭병의 경험에, 인공호흡기를 끼고 목 아래론 움직일 수 없게 된 닐의 시선이 닿는 일상의 아름다움, 지난 삶과 함께 아내와 아들의 미래를 바라보는 그의 생각이 뭉클하게 더한다. 공기처럼 당연했던 살아 숨 쉬는 것의 감각을 일깨운다.

전 세계 웃기고 울린 투병기

아들 오스카와 닐의 즐거운 한때. [사진 독포레스트]

아들 오스카와 닐의 즐거운 한때. [사진 독포레스트]

“루이즈와 제가 결혼한 지 4년이 됐어요. 그중 1년은 투병하며 보냈죠. 아내가 겪어야 했던 육체적 고통, 강인한 정신력과 성품을 누가 알 수 있겠어요. 루이즈 사랑해. 앞으로도 사랑할 거야.”

“자기 장례식을 준비하는 건 재밌어요. 나무관은 비싸고 (중략) 가장 중요한 건 사무적이고 행정적인 일을 최대한 미리 해두는 거예요. 그래야 좀 더 마음 편히 갈 수 있을 테니까요.”  

“오스카, 에든버러 예술학교 건축과에 다니던 시절 가장 중요했던 건 아름다운 한 소녀(결혼 전 아내)가 포켓볼 치는 모습을 보는 거였어. 니 엄마와 나는….”

“네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언해줄 수 없어. 하지만 이 말을 해줄게 악기 하나는 꼭 다뤄보렴!”

오지 여행을 가서 대자연 속에 섰던 그의 예전 모습, 아내 루이즈와 수영을 즐기던 때, 지평선에 작열하는 햇살 등 홈비디오로 간직했던 추억에 지금의 현실이 엇갈린다. 블로그 글 한 문장을 제대로 적기 위해 마이크에 입을 바짝 대고 수십 번씩 같은 말을 해야 하는 달라진 일상.
‘나 숨 쉬고 있어(I am breathing)’란 뜻의 제목처럼 닐의 나직한 숨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린다. 인공호흡기를 거친 이 거친 숨소리가 “제 인생의 사운드트랙이기 때문”이란 닐의 요구였단다.

"신발 낡아 발 끌리는 줄만 알았죠"

휴대폰 요금제를 해지하려 할 때의 일화도 나온다. 통신사의 전화 상담 직원이 이유를 묻자 그는 “제가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아, 그러시군요. 고객님. 그럼 이건 어떨까요. 이번에 굉장히 좋은 요금제가 나왔는데요. 3개월 무료….” 상담사의 말에 그는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고 했다.

루게릭병 발병 후 닐을 돌보기 위해 집엔 늘 간병인과 가족, 친구들이 머물렀다. [사진 독포레스트]

루게릭병 발병 후 닐을 돌보기 위해 집엔 늘 간병인과 가족, 친구들이 머물렀다. [사진 독포레스트]

“걸을 때 오른발이 땅에 끌리는 느낌이었어요. 신발이 낡아서 그런 줄 알았어요.” 갓 태어난 아들 오스카와 그리니치 천문대로 가족여행을 갔던 2007년 연말을 닐은 이렇게 돌이켰다. 여행을 다녀오고 며칠 후 크리스마스 땐 지팡이를 써야 했다. 불과 6개월 뒤엔 손, 얼마 뒤엔 다리를 쓸 수 없게 됐다. 아들 오스카의 돌잔치엔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촬영 당시엔 이미 인공호흡기를 끼고 목 아래론 움직일 수 없게 됐다.

아버지도 10년 전 같은 병으로...

다큐는 하루하루 심해지는 닐의 병세를 드러낸다. 그를 씻길 때 깡마른 등, 병간호를 위해선 집안에 최소 두 명 이상 성인이 필요해 간병인과 가족‧친구들이 드나드는 통에 사생활이 없어진 현실도 함께다. 결코 신파적이진 않다. 오히려 어쩌면 오스카가 보게 될 아빠 닐의 마지막 순간들을 그의 모습 그대로 유쾌하게 기록한다. 발병 전엔 건축일을 하며 바쁘게 돌아갔던 일과를 모두 멈추고, 이제 닐은 고요한 거실에서 무릎 위에 앉은 오스카의 온기, 아내의 손길을 온전히 느낀다.

다큐에서 닐은 건축가로서 가족의 집을 지었던 때처럼, 가까워지는 죽음 앞에 아내와 아들의 미래를 덜 힘들게, 더 행복하게 짓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사진 독포레스트]

다큐에서 닐은 건축가로서 가족의 집을 지었던 때처럼, 가까워지는 죽음 앞에 아내와 아들의 미래를 덜 힘들게, 더 행복하게 짓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사진 독포레스트]

힘겨운 투병 중 그는 왜 다큐까지 찍기로 했을까. 2009년 2월 24일, 숨을 거두기 하루 전날까지 그는 마지막 힘을 짜내 블로그에 자신의 심경과 루게릭병에 대해 썼다. 한 단어조차 내뱉기 힘든 그 모습을 분명히 카메라에 담고 싶어 했다. “닐은 병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뭐든 하고 싶어 했어요.” 모라그 맥키넌 감독은 말했다. 그리고 닐이 그렇게 했던 이유는 다큐에 이렇게 설명됐다. 닐의 루게릭병 발병 10년 전 그는 50대였던 아버지를 같은 병으로 잃었다. 의사들은 유전적 발병확률이 반반이라 했다. 설마, 하던 자신에게 이런 비극이 닥칠 즈음 그는 첫 아들을 얻었다. 닐은 이 병에 더 많은 연구, 후원, 치료법이 생기길 바랐다. 이 병이 영영 불치병으로 남길 원치 않았다.

"웃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다"

“놀라울 정도로 살아있고 낙천적이며 진정 영감을 불어넣는다.”(인디와이어) “웃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다.”(뉴욕타임즈)
닐이 2009년 세상을 떠나고 4년 뒤 영화가 선보였을 때 받은 호평이다. 다큐계의 칸영화제로 불리는 암스테르담국제다큐영화제 경쟁부문 진출 등 세계 30곳 이상 영화제에 초청됐다. 이후 자발적 릴레이 상영이 지금도 54개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난 추억들을 다시금 떠올려 보면서, 시간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제 생각이 옳았다는 게 확실해졌어요. 여러분 부탁합니다. 시간을 생각 없이 보내지 마세요.”

그가 블로그에 남겼던 글이다. 개봉 규모가 작은 다큐다보니 개봉 첫 주인 지금도 예매 가능한 극장이 전국 20곳이 채 안 된다. 서둘러야 그의 이야기를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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