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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스 수사관이 남긴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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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문병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문병주 사회2팀장

문병주 사회2팀장

검찰·경찰 공무원들이 전하는 한해 마무리 인사 중 귀에 꽂히는 하나가 있다. “너무 열심히 살지 말자.” 서울 서초동발 충격,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한 검찰 수사관의 영향이다.

조직에서 ‘에이스’로 통했던 만큼 그의 활동 영역과 인맥은 상당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그는 청와대 근무에 적합한 인물로 추천됐다. 검찰 수사관이라면 한 번쯤 가고 싶어 하는 자리였다. 민정수석실 산하 감찰반, 그중에서도 그는 극소수만 속할 수 있는 특수관계팀에서 활동했다. 이른바 ‘별동대’로 불렸다.

특출했던 업무수행 능력과 “길 가다가도 노숙자를 보면 몇만 원씩 선뜻 쥐여주던” 그가 숨진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김기현 전 울산시장에 대한 ‘하명수사’ 의혹에 휘말렸다는 것과 서울동부지검에서 진행 중인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청와대 감찰 무마 의혹 사건을 수사 중인 부서에 배치됐다는 것 정도만 팩트로 인정된 상황이다.

노트북을 열며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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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잘 안다는 한쪽에서는 부당한 일인 줄 알면서 청와대 상부의 지시대로 임무를 수행했고, 그 사실을 검찰 조사에서 진술해야 하는 부담감이 컸다고 전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있지도 않은 거짓 사실을 털어놓게 하기 위해 검찰이 무리하게 압박했다며 공식·비공식적으로 검찰을 비판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아무도 나서서 “내 책임이다”고 말하는 이는 없다. 결국 실무를 보다 무언지 모를 험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책임을 지는 형국이 돼 가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동료 수사관들의 심정은 수없이 전해지고 있다. 경찰 쪽도 마찬가지다. 수사권조정 문제를 놓고 다툰다지만 하는 일이 비슷하다 보니 동병상련의 심정이라고 한다. 단순히 연말 씁쓸한 단상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형법상 직무유기 수준은 아닐지라도 공직사회의 보신주의로 번질 태세다.

이런 가운데 그가 남겨놓은 스마트폰이 진실을 풀 열쇠로 부각됐다. 검찰과 경찰에서는 그가 남겨놓은 다른 기록, 접촉한 인사들에 대한 조사를 각각 진행하고 있다. 기술적 한계가 있지만 두 수사기관이 경쟁하듯이 수사 중인 점은 고무적이다. 이런 의지대로라면 직·간접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주변인들은 곧 드러날 것이다.

유명을 달리한 수사관과 관련한 진실 규명은 하명수사 의혹이나 감찰 무사 의혹 사건과 엮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올해 적당히 삽시다.” 그런 신년 인사가 오가는 모습이 내년 초 대한민국 공직사회의 보편적 분위기로 받아들여지는 걸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는 길이다.

문병주 사회2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