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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인화경영’ 선구자, 구자경 명예회장

중앙일보

입력

상남 구자경 LG 명예회장은 구인회 창업 회장의 뒤를 이어 1970년 1월부터 1995년 2월까지 만 25년 동안 LG의 2대 회장으로 재임하며 오늘날 LG의 기틀을 닦은 경영인으로 평가받는다. 1950년 LG의 모기업인 락희화학에 입사한 이래 20여년간 현장에서 익힌 경영 역량을 바탕으로 25년간 럭키금성(LG의 전신)을 이끌었다. 더욱이 고인은 70세 때 은퇴 결정을 내리고 다음 세대에 경영을 물려줬다. 당시는 1995년으로 ‘세계화’ 패러다임이 한국에 들어오기도 전이었다.

검정 뿔테에 내실과 인화 중시한 경영인 

생전 고인은 검정 뿔테안경에 경상도 사투리가 트레이드 마크였다. 내실과 안정, 그리고 인화를 중시하는 경영 스타일로 유명했다. 남들과는 다른 안목으로 먼저 미래를 내다봤던 고인의 삶을 사진으로 정리해봤다.

LG화학 부산 부산진구 연지동 공장 앞에서 사진 촬영 중인 구씨 일가. 왼쪽부터 구인회 창업 회장, 구평회 창업 고문, 구자경 명예회장,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

1970년 1월 취임 당시의 구자경 명예회장. 창업주 구인회 선대회장이 급작스럽게 별세하면서 2대 회장으로 취임하게 됐다. 진주 사범을 졸업한 고인은 부산 사범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50년 부친의 부름을 받아 그룹의 모회사인 락희화학 공업사(현 LG화학) 이사로 취임하면서 경영에 참여했다. 1970년 회장으로 취임할 당시 그룹은 럭키와 금성사, 호남정유 등 8개사에 연간 매출은 270억원이었다.

1983년 2월, 금성사 창립 25주년을 맞아 ‘서비스카 발대식’에서 서비스카에 시승해 환하게 웃고 있는 구 명예회장.

재계의 구심점 역할, 전경련 회장 

1987년 2월, 제26차 전경련 정기총회에서 18대 회장에 추대된 구자경 명예회장(왼쪽)이 정주영 전임회장으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1977년부터 10년간 재계를 대표하는 전경련을 이끌었던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구 회장이라면 전경련 회장을 충분히 잘 이끌 수 있다”며 극구 고사하는 구 회장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생전 두 사람은 매우 각별한 관계였다고 한다.

1987년 5월, 서울 우면동에 위치한 금성사 중앙연구소 준공식에 참석한 구 명예회장(왼쪽). 현재 LG전자 우면동 R&D 연구소의 원형이다. 구 명예회장은 LG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고자 연구개발을 통한 신기술 확보에 주력했다. 회장 재임 기간에 설립한 국내외 연구소만 70여개에 이른다.

LG는 1995년 신년 시무식을 기해 그룹 명칭을 ‘럭키금성’에서 ‘LG’로 바꾸고, 새로운 CI를 발표했다. 오늘날의 LG 로고의 원형이다. 구 명예회장은 70세이던 1995년 '21세기를 위해서는 젊고 도전적인 인재들이 그룹을 이끌어나가야 한다'며 장남 고(故) 구본무 회장에게 그룹을 넘겨줬다. 고인이 경영에서 물러날 당시 LG는 30여개 계열사에 매출액 38조원의 재계 3위로 성장했다. 특히 구 명예회장은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의 권한을 이양하고 이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게 하는 '자율경영체제'를 그룹에 확립했다.

퇴임 이후 사회공헌활동에 주력

1999년 10월 LG화학 여수공장을 방문해 시설현황을 살피고 있는 구 명예회장.

고인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교육 활동과 공익재단을 통한 사회공헌활동에 주력해 왔다. 2012년 2월 구 명예회장이 연암대학교 학위수여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brad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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