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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진정한 리더의 힘 보여준 박항서 감독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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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5호 30면

지난 10일 밤 베트남은 잠들지 못했다.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이 그토록 꿈꾸던 동남아시아 경기(SEA 게임) 우승을 60년 만에 이뤘기 때문이다. 금성홍기(베트남 국기)의 붉은 물결과 환호 속에 태극기도 나부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이방인 박항서 감독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시였다. 2017년 10월 베트남에서 새 축구 인생을 시작한 지 2년여 만에 그는 한 나라의 꿈을 이뤄준 리더로 우뚝 섰다.

베트남 축구 60년 숙원 푼 국민 영웅 #푹 총리 “경제·사회·문화 발전 영감 줘” #한국 정치권, 리더의 덕목 성찰해야

박 감독의 성공 신화가 베트남 사회에 미칠 파급력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오합지졸 대표팀의 승승장구를 목격한 베트남 국민의 성취동기는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민족의 잠재력과 성장 동력이 언제든 폭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사회 곳곳에 스며들 게 틀림없다. 진정한 리더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긍정의 에너지다. 이런 승자의 경험을 베트남 정치권도 반기고 있다.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총리는 금의환향한 박 감독을 곧장 총리실로 초대해 “이번 승리는 경제·문화·사회 발전에 영감을 줘 베트남을 강국으로 건설하게 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국민도 그런 영감을 받은 적이 있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일군 2002년의 히딩크 감독이 준 선물이었다. 그 축제를 경험한 세대에겐 후세들과 다시 한번 경험하고 싶을 정도로 값진 추억이다. 히딩크 감독처럼 박 감독도 베트남 선수들을 변화시키고 국민을 감동시켰다. 이방인의 냉철한 시각으로 약점을 하나씩 보완했다. 한국 축구계가 “기술력이 부족하다”고 할 때 히딩크가 “체력이 문제”라고 진단했듯, 박 감독은 “체력이 약하다”는 베트남 선수들에게 “상체 근육과 체지방이 부족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식단을 바꿨다. 후배 선수에게 존칭을 쓰지 못하게 해서 권위주의 문화를 바꾼 것(히딩크)과 식사 시간에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못하게 해 개인주의 문화를 없앤 점(박항서)도 닮았다. 쌀이 많이 나는 베트남에서 비슷한 성공을 거둔 박 감독을 ‘쌀딩크’라고 부르는 이유다.

지난 1월 베트남 대표팀이 사상 최초로 아시안컵 8강에 올랐을 때 승부차기 승리의 주역인 골키퍼 당반람은 “그는 마스터이자 파더, 빅 모티베이터(동기부여자)다. 우리를 모든 경기에서 더 강하고 잘하게 만들어 준다”고 존경심을 표했다. 지난 10일의 인도네시아와의 SEA 게임 결승전에서 박 감독이 거친 파울에 항의하다 퇴장당하자 현지에서는 “병아리를 보호하려는 어미 닭 같았다. 아버지 같은 마음이 국민 코끝을 찡하게 했다”고 전했다. 3대 0으로 앞선 상황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으려는 지략이기도 했지만, 리더에 대한 신뢰는 그렇게 깊어졌다.

성공의 기억을 새겨주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리더를 갖는 것은 축복이다. 성과도 없고 리더도 안 보이는 2019년 한국 정치권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반환점을 돈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 정책, 일자리, 남북 관계 등에서 뒷걸음질만 했다. 512조원 예산은 마치 ‘남의 돈’처럼 국회를 통과했다. 청와대 하명 수사 의혹 등이 확산일로인데도 문 대통령은 책임 있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공수처법과 선거법이라는 중차대한 이슈가 장기판의 졸처럼 국회를 떠돌아도 제1야당은 얼어붙은 수비수처럼 속수무책이다. 의회민주주의의 상징인 국회의장을 지낸 인사가 국무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촌극도 벌어진다.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국가대표 선수들의 동계 훈련을 위해 오늘 한국에 입국한다. 2020년 도쿄 올림픽 본선 진출,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최종 예선 진출이라는 베트남의 새 역사에 도전하기 위해서다. 그는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았다. 초심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오랜만에 귀국한 성공한 리더에게서 작은 영감이라도 얻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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