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가끔은 목적 없는 시간도 즐겨보자, 하재연의 시처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전새벽의 시집읽기(49)

사람마다 약속장소를 고르는 유형이 다르다. 시계탑 앞에서 만나자는 ‘고전파’가 있는가 하면 “네가 내리는 버스정류장에서 만나자”고 하는 ‘배려파’도 있다. 또, 바로 음식점으로 오라며 주소를 찍어주는 ‘실속파’도 있다. 나? 나는 ‘서점파’다. “서점 앞에서 봐”가 내 단골 멘트다. 그리고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그곳에 간다. 만나기로 한 사람 기다리며 서점 구경하는 것은 오랫동안 간직해온 나만의 ‘소확행’이다.

서점 산책을 하다 약속 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가면, 지인들은 묻는다. “뭐 샀어?” 하지만 아무것도 사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 서점산책에는 애초에 목적이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서점 관계자 여러분)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요새 서점에서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에게는 통 목적이랄 게 없어 보인다. ‘이 책을 사야겠다!’는 목적이 있는 사람들은 인터넷 주문을 한다. 서점에서 발품을 파는 일이 전혀 ‘효율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 서점에서 눈에 띄는 부류는 대부분 멍한 얼굴을 가진, 나같이 한가한 사람들뿐이다.

사람마다 약속장소를 고르는 유형이 다른데, 나는 '서점파'이다. 서점 산책을 하다가 약속 시간이 되면 밖으로 나간다. 서점에서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목적이랄 게 없어 보인다. [사진 pixabay]

사람마다 약속장소를 고르는 유형이 다른데, 나는 '서점파'이다. 서점 산책을 하다가 약속 시간이 되면 밖으로 나간다. 서점에서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목적이랄 게 없어 보인다. [사진 pixabay]

한가한 사람들이 빚어내는 한갓진 풍경이 좋아, 나는 계속해서 서점에 간다. 가서 종이 냄새를 맡는다. 반짝이는 표지를 어루만진다. 그리고, 나와 비슷하게 그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을 본다. 태평한 풍경이지만, 동시에 필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밖에서는 똑같이 ‘목적 있는 삶’이란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라서, 서점이라도 별다른 목적 없이 오고 싶다는 절박함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시집 코너를 기웃거리다가 이런 시를 만났다.

그녀는 책장을 넘기고 있었고
남자가 문 열린 차를 타고 벼랑으로 내달았고
고양이가 식탁 위의 커피잔을 건드렸고
양탄자가 약간 들썩거렸고
고장난 시계 초침이 열두 번을 돌았고
소년은 마라톤 결승 테이프를 끊었고
그녀는 행운을 빌었으나
양손이 쪼글쪼글해지고
머리칼이 가늘어지고
커피는 쏟아졌고 양탄자는 젖지 않았고
남자가 녹색 지붕 아래 비행하는 순간

-하재연, 「동시에」전문. 시집 『라디오 데이즈(문학과지성사, 2006)』에 수록.

명색이 「시집읽기」 코너를 연재하는 자로서 할 말은 아니다 싶은데 이 시를 읽고 필자, ‘뭔 소리야?’라고 생각해버렸다. 저런, 시를 소개하는 사람이 이런 태도로 시를 대하다니. 나는 그날 하재연의 시집들을 샀다. 그리고 며칠 뒤, 조용한 책상에 앉아 그녀를 읽다가 문득, 그녀가 그리는 세계가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해하게만 보이는 위의 시에서 유일하게 친절한 대목이 있다면 그것은 제목이다. ‘동시에’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위의 사건들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책장을 넘기는 일이나 ‘남자’가 차를 벼랑으로 몰고 가는 일에는 어떤 인과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유추해볼 수도 있다. 인과관계에 놓인 사건들이라면 시간을 두고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이 사건들의 목적은 대체 무엇인가. 시인은 끝내 그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 결과, 시가 쓰인 목적을 모르겠다.

목적이 불분명한 상태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사회가 목적을 가지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시를 보면 바로 그 의미부터 해석하려고 드는 것도 그 가르침의 결과물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목적 없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돈 안 되는 일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휴식을 불안으로 여기며, 사교관계조차 단순한 이해관계로 이해하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하재연 시집『라디오 데이즈』.

하재연 시집『라디오 데이즈』.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위의 시를 두고 ‘‘반(反)목적론적 트임의 세계’라고 말한다. 시에 나열된 사건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보이지 않으므로, 또 어떤 명확한 목적을 드러내고 있지 않으므로 그렇다는 것이다. 그는 덧붙여 ‘반(反)결말’, ‘반(反)구조’라는 말도 쓴다. 시가 반드시 어떤 결말에 이르러야 한다는, 혹은 어떤 구조를 지녀야 한다는 통념을 시인이 의도적으로 비껴가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의 이와 같은 시도가 내게는 투쟁으로 비친다. ‘목적 있는 삶’이라는, 우리를 짓누르는 강박을 해체하고, 실제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 단편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기록함으로써 진짜 삶의 본질을 목격하고 싶다는, 시인의 숭고한 실험으로도 보인다.

1975년에 서울에서 태어난 시인 하재연은 국어국문학 박사이자 인문학 연구교수이기도 하다.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되묻게 하는 ‘인문학’ 연구를 위해, 그녀는 이런 실험들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꼭 모든 것에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하는가? 그녀는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무목적적 현상을 차별하지 않고 관찰한다.

한편 ‘향기처럼 휘발하는 감각들에 대한 재빠른 스케치’라는 출판사의 평이 뭐라 말할 수 없이 마음에 든다. 휘발해버리는 것들을 보고 기록하는 일, 그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 당신은 결국 허무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의 삶도 그렇게 휘발해버리는 것에 불과할 텐데 말이지.

목적 있는 삶은 활기차지만, 목적이 없는 시간도 즐길 줄 아는 것이 좋겠다. 삶에는 그러한 시간이 아주 많이 있으니까. 돈벌이와는 상관없는 시간도, 쾌락추구란 목적이 없는 순간도 모두 우리 인생의 일부인 것이다. 끝으로 같은 시집에 실린 하재연의 시를 한 편 더 옮기며 글을 마친다.

목적이 불분명한 상태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사회가 목적을 가지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목적 있는 삶은 활기차지만, 목적이 없는 시간도 즐길 줄 아는 것이 좋겠다.[사진 pxhere]

목적이 불분명한 상태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사회가 목적을 가지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목적 있는 삶은 활기차지만, 목적이 없는 시간도 즐길 줄 아는 것이 좋겠다.[사진 pxhere]


그림자들이 여러 개의 색깔로 물든다
자전거의 은빛 바퀴들이 어둠 속으로 굴러간다
엄마가 아이의 이름을 길게 부른다

누가 벤치 옆에
작은 인형을 두고 갔다
시계탑 위로 후드득 날아오르는 비둘기,

공기가 짧게 흔들린다
벤치, 공원, 저녁과는 상관없이

-「휘파람」 전문

회사원·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