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의 빈 마음을 채워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중앙일보

입력 2019.12.13 12:00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54)

프레데릭 쇼팽 초상화. [사진 Wikimedia Commons]

프레데릭 쇼팽 초상화. [사진 Wikimedia Commons]

쇼팽의 삶에서 상드가 차지하는 부분은 컸다. 부지런한 상드는 쇼팽을 적극적으로 챙겼고 그가 필요하다고 하기 전에 모든 것을 준비해 주었다. 연인, 음악적 영감의 원천, 엄마, 간호원, 친구 그리고 매니저. 그녀의 역할은 어떤 것이든지 쇼팽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상드와 함께 사라졌다.

7년 만에 처음으로 노앙이 아닌 파리에서 여름을 보내게 되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건지 궁금했을 것이다. 그도 이해할 수 없었고 때문에 궁금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끝인가?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쇼팽은 마음에 멍한 채로 익숙하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상드의 딸 솔랑주와는 계속 만났다. 노앙의 다툼 이후 솔랑주는 뜻하지 않은 엄마와의 결별에 울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솔랑주 부부가 결혼 지참금으로 받은 건물은 상드가 회수해 갔다. 솔랑주는 엄마가 자기를 버렸다며 신세타령을 늘어놓았다.

빚에 쫓기는 솔랑주 부부는 길바닥으로 쫓겨 날 지경으로 몰렸다. 보호자 역할을 자청하고 있던 쇼팽은 자신도 넉넉지 않았지만 급한 돈이 필요한 그들 부부에게 돈을 빌려주었고, 나아가 클레징제에게 일거리를 찾아 주기 위해 노력했다.

솔랑주는 노앙의 엄마를 찾아가서 화해를 시도했다. 하지만 상드는 차가웠다. 솔랑주는 혼전에 자신이 사용하던 방이 극장으로 개조된 것을 보고 상심했다. 쇼팽은 솔랑주의 시도를 격려했다. 엄마와 딸이 화해하면 자신과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도 가져보았을 것이다. 출산을 앞둔 딸에 대해 숙명적 엄마의 역할을 상드가 포기하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쇼팽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허물어져 가는 벽에 쳐진 거미줄 같은 자신을 보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 홀로 떨어져서 하염없이 소식을,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은 지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며 희망도 줄어들었다.

10월이 오자 홀로 남겨진 쇼팽을 로스차일드 가족이 신경을 써주었다. 그는 파리 인근 페리에르에 있는 로스차일드 대저택에 초대되어 며칠을 머물렀다. 화려한 저택에서는 부족한 것이 없었고 모든 것이 제공되었다. 쇼팽은 로스차일드 가족의 딸 샬롯에게 그의 마지막 출판 작품 중 하나인 왈츠(작품번호 64-2)를 헌정했다.

스쿠아르 도를레앙의 쇼팽 아파트 거실. [사진 Wikimedia Commons]

스쿠아르 도를레앙의 쇼팽 아파트 거실. [사진 Wikimedia Commons]

쇼팽의 생활에서 상드의 경제적 기여가 새삼 분명해졌다. 워낙 자신의 수입만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았는데, 쇠약해진 몸에 레슨도 줄여야 했으므로 재정상태는 엉망이었다. 다시 파리에 혹독한 겨울이 왔다. 유난히 추운 그해의 기후는 쇼팽의 활력을 더 앗아갔다. 외출도 할 수 없었다. 거의 매일 머리는 심하게 아팠고 숨도 막혔다.

절친 그셰마와는 사업에 잘못 투자해서 큰돈을 날렸다. 그를 가끔 돌보아주던 마릴리아니 부인은 이혼 소송을 벌이고 있었다. 마(魔)가 낀 건지 1847년은 모두를 힘들게 하는 것 같았다. 지긋지긋한 한 해가 빨리 끝났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데 그해 마지막 날, 스쿠아르 도를레앙의 상드 아파트에서 짐이 실려 나가는 것이 보였다.

상드의 아파트의 가재도구는 쇼팽도 자신의 삶의 일부와도 같이 익숙한 것이었다. 마지막 희망도 꺼지는 듯했다. 저녁마다 몰려들었던 사람들, 저마다의 시끄러운 얘기들, 많은 일에 얽혔던 상드와의 기억이 손가락 사이로 물이 흐르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상드도 과거를 돌아보면 나와의 좋은 추억을 떠올릴 거야”하고 자신을 위로했지만, 그것은 쇼팽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노앙을 마지막으로 떠나온 후 쇼팽은 첼로소나타(작품번호 65번)를 완성했다. 첼리스트 프랑숌을 위한 이 곡에 그는 몇 년간 매달렸었다. 이미 상드와의 관계가 비틀거리는 중이었다. 그의 만년의 원숙한 기법이 녹아 있는 대작이지만 어떤 이는, 그를 받치고 있던 많은 것이 허물어져 가고 있는 것이 반영되어 피아노와 첼로, 두 악기의 조화가 흔들리고 있다고 평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곡의 첫 주제가 슈베르트(1797~1828)의 연가곡집 겨울나그네의 첫 곡에서 따온 것이라는 점이다. 보리수 등 우리도 잘 알고 있는 곡이 들어있는 겨울나그네는 쓸쓸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슬픈 노래들로 구성되어있는데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절망이다. 슈베르트는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며 이 연가곡집을 완성했고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슈베르트의 곡은 파리에서도 자주 연주되었었고 쇼팽과 상드는 슈베르트 애호가였다. 또한 쇼팽 악보의 독일 출판업자 슐레징거는 슈베르트의 출판업자이기도 했으므로 쇼팽으로서는 작곡가와 곡이 모두 친숙했다. 쇼팽의 친구 페르디난트 힐러도 그의 곡을 듣고 눈물을 흘렸었다.

프란츠 슈베르트. 그의 연가곡집 겨울나그네 첫 곡에서 쇼팽은 자신의 첼로 소나타의 첫 주제를 따왔다. [사진 Wikimedia Commons]

프란츠 슈베르트. 그의 연가곡집 겨울나그네 첫 곡에서 쇼팽은 자신의 첼로 소나타의 첫 주제를 따왔다. [사진 Wikimedia Commons]

겨울나그네는 사랑에 실패한 청년의 방랑을 그렸다. 봄날에 시작된 사랑은 추운 겨울에 깨어졌다. 첫 곡에서, 사랑을 잃은 남자는 ‘안녕히(Gute Nacht)’라는 짧은 메모를 남기고 여인의 문 앞에서 돌아선다. 그의 앞에는 다만 눈 덮인 길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원곡에서 멜로디는 높은음에서 낮은음으로 자꾸만 흘러가고 있고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리듬은 장송곡을 연상시킨다. 쇼팽의 첼로 소나타 첫 구절이, 연인에게 버림받고 쓸쓸히 추운 들판으로 길을 떠난다는 곡의 멜로디로 시작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자신이 버려졌다는 생각과 절망을 말하려 한 것인가?

상드와 헤어진 후 상심한 쇼팽은 몸을 지탱하기도 어려웠지만, 경제적 이유로 레슨을 멈출 수가 없었다. 레슨 중, 학생이 가르침을 이해 못 하면 짜증을 내는 ‘시끄러운’ 수업의 빈도는 늘어났다. 그는 피아노 옆의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채 학생들에게 이것저것을 주문했다.

작곡도 줄어들었으므로 작품출판에서 들어오는 수입도 거의 없어서 그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아는 친구들이 그에게 연주회를 열라고 설득했다. 플레옐 홀에서의 지난 연주회는 음악적으로나 금전적으로 큰 성공이었다. 그로부터 벌써 6년이 지났다. 연주회를 치러내는 것이 쇠약한 그에게 버거울 거라는 것을 알았지만, 쇼팽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쇼팽이 ‘떠나기 전’에 무대에 설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표는 잘 팔려나갔다. 왕궁에서까지 많은 표를 구매했다. 노앙의 상드는 소식을 듣고 어디로 ‘떠나는 지’ 궁금해했다. 지난번 연주회 때는 그녀가 세세한 것까지 준비해 주었었다.

이번 연주회는 상드를 대신해서 친구인 플레옐, 오귀스트 레오와 함께 제인 스털링이 도와주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부유한 상속녀 제인은 쇼팽의 제자로서, 어려운 그를 주위에서 묵묵히 보좌해주고 있었다.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게 많았다. 연주 홀은 외풍이 없어야 했고 갑갑해서도 안 되었다. 그가 불편해하지 않으려면 친근한 사람들의 얼굴이 앞자리에서 보여야 했다.

연주회 목록에는 친구 프랑숌과 함께 연주할 첼로 소나타가 들어있었다. 노앙에서 작업한 마지막 곡이었고 곡의 공식 석상의 초연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 1악장을 빼고 2악장부터 연주하기로 결정했다. 겨울나그네에서 첫 부분을 따온 1악장이었다. 쇼팽에게 아픈 상처를 들쳐내는 악장이었다.

슈베르트의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의 첫 곡 '안녕히'의 첫 소절. [사진 Wikimedia Commons]

슈베르트의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의 첫 곡 '안녕히'의 첫 소절. [사진 Wikimedia Commons]

그의 연주는 점점 힘이 부족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1847년 2월 16일의 연주회에서 쇼팽의 자세는 꼿꼿했고 연약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정신적, 육체적 모든 힘을 불러와서 무대에 쏟았다. 연주를 끝내고 대기실로 돌아와서는 기절하다시피 쓰러졌다. 파리에는 혹독한 겨울바람 속에 감기가 유행하고 있었다. 모든 기력을 토해낸 그도 그것을 피해갈 수 없었다.

비평가들의 평은 좋았다. 쇼팽의 친구 퀴스틴은 쇼팽이 소중한 것을 잃고 난 후 대신 얻은 감정의 깊이를 이해했다. “당신은 고통 속에서 시감(詩感)을 얻었군요. 당신 작품의 슬픔이 가슴에 더 깊이 파고듭니다. 관객 속에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당신의 외로움을 함께 느낍니다. 당신이 연주한 것은 피아노가 아니라 영혼입니다.”

연주회가 가져다준 수익은 경제적 압박을 줄여 주었다. 분위기를 타고 두 번째 연주회를 3월 10일에 열겠다고 선언했다. 생각대로만 되면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2월 연주회가 있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프랑스는 뒤집혔다.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파리의 거리는 함성과 총성으로 뒤덮였다. 쇼팽의 삶을 지지하던 최소한의 기초들도 무너져 내렸다.

다음 편은 혁명의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쇼팽과 상드의 마지막 만남과 파리를 떠나는 쇼팽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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