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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 "내 묘비명은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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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이 12일 서울 광화문 한 식당에서 열린 신간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나태주 시인이 12일 서울 광화문 한 식당에서 열린 신간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인생은 귀한 것이고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란 걸 / 너희들도 이미 알고 있을 터, / 하루하루를 이 세상 첫날처럼 맞이하고 / 이 세상 마지막 날처럼 정리하면서 살 일이다 / 부디 너희들도 아름다운 지구에서의 날들 / 잘 지내다 돌아가기를 바란다 / 이담에 다시 만날지는 나도 잘 모르겠구나." (나태주의 '유언시' 중에서)

나태주(74) 시인의 등단 50주년을 기념하는 신간 시집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열림원)가 나왔다. 내년은 '풀꽃 시인'으로 알려진 나태주가 등단한 지 햇수로 50년 되는 해다. 나 시인은 1945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나 시인은 1964년부터 2007년까지 43년간 초등학교 교단에서 일하며 시인으로 활동했다.

12일 서울 광화문 한 음식점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나 시인은 "가늘고도 긴 길이었다. 보잘것없는 자의 푸념이며 하소연이고 고백이었다. 들어주신 당신, 선한 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라며 지난날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그는 1973년 첫 시집을 출간한 뒤 지난 2월에 나온 『마음이 살짝 기운다』까지 총 41권의 창작시집을 출간했다. 시집 외에도 10여권의 산문집과 여러 권의 동화집과 시화집을 펴내며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번 시집에는 신작 시 100편과 '풀꽃 연작시'를 포함, 독자가 사랑하는 대표 시 49편, 나 시인이 꼽은 시 65편이 담겨 있다.

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로 '풀꽃' 연작시를 꼽았다. 그는 "나를 시인으로 널리 알려준 시들이라 기억에 많이 남을 수밖에 없다"며 "이 시를 통해 비로소 아름다운 모국어를 널리 알리는 시인 역할을 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풀꽃 1) 

"기죽지 말고 살아봐 / 꽃 피워봐 / 참 좋아." (풀꽃 3)

그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시로는 그의 등단작 '대숲 아래서'를 꼽았다. 그는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준 시이자 초기에 시를 쓰던 나의 마음이 담겨 있는 시라서 나에게는 의미가 깊은 시"라고 소개했다.

"바람은 구름을 몰고 ./ 구름은 생각을 몰고 /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 (중략) /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 자국 /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대숲 아래서' 중에서)

이날 나 시인은 "나에게 시는 '연애편지'와 같다"고 밝혔다. 그는 "16살에 예쁜 여자에게 연애편지로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한 여자가 불특정 다수로 바뀌었다"며 "연애편지에는 사랑하고 아끼고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예쁜 마음이다. 이는 시를 닮았다"고 설명했다.

50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면서 완성된 시 철학에 대해서는 "오늘날 다 지치고 힘들다고 하는데, 시는 이런 사람들에게 화내지 말고 살아보자, 너는 귀한 사람이다, 아름답다, 사랑받고 있다고 말하며 그들을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12년 전 췌장에 큰 병이 생겨 죽을 위기에 처했던 경험도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현재의 시 스타일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나태주 시인은 "나태주만의 아우라가 있는 시를 쓰고 싶다"고 밝혔다. [사진 뉴스1]

나태주 시인은 "나태주만의 아우라가 있는 시를 쓰고 싶다"고 밝혔다. [사진 뉴스1]

이어 나 시인은 "나도 처음엔 구성과 레토릭 등이 있는 시다운 시를 썼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시답지 않은 시를 쓰고 싶어졌다"며 "시답지 않은 시, 나태주만의 아우라가 있는 시를 쓰고 싶다. 이제는 생전에 듣도 보도 못한 시가 진짜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시인은 평소 스마트폰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시를 쓴다. 그는 강연을 가기 위해 걷거나 열차나 차로 이동하는 중간에 떠오르는 시상을 스마트폰 메모장에 바로바로 적는다. 이날도 그는 충남 공주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쓴 '노마드'란 제목의 시를 직접 낭송했다. 나 시인은 "나의 시 노트 필기장은 스마트폰"이라며 "우리나라가 유교, 농경 사회의 삶을 살았지만 이젠 유목의 삶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설명했다.

그는 요즘 자신의 묘비명을 생각하고 있다. 원래는 자신의 시 '풀꽃 1'을 묘비명으로 하려 했다. 그런데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2011)의 마지막 장면에서 '풀꽃 1'이 묘비명으로 나오는 바람에 묘비명을 다시 구상해야 했다. 새롭게 정한 묘비명은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이다. 그는 "매일 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아침저녁으로 시 원고를 본다"고 말했다.

나 시인은 "나는 나이가 들어 '용도가 폐기된 인간이다"라면서도 "시를 통해 사람들에게 '서비스'하는 것이 아직도 내가 세상에 남아있는 이유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시는 길거리에 버려진 것들, (세상에) 널려 있는 것들이다. 나는 그걸 주워다 쓰고 있을 뿐"이라고 전했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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