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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맞은 『용비어천가』주인 품에 되돌아 온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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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63)


내사본에 남긴 책 주인의 이름

대구가톨릭대학교 중앙도서관에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목판본 5책이 보관돼 있다. 1659년(효종 10) 간행된 중간본이다. 또 1670년(현종 11)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와 중국 상인이 만나 주고받은 통역서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라는 희귀본도 있다.

대구가톨릭대는 2014년 5월 개교 100주년을 맞아 이들 책을 포함한 광주(廣州) 이씨 석전(石田)문중이 1980년대 기증한 고서 일부를 전시했다. 당시 선보인 서책에는 명나라 법전인 대명률을 이두로 번역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20일간의 기록인 『남한일기(南漢日記)』 등이 포함돼 있다. 문중은 당시 2500여 점을 기증했다고 한다.

 귀암고택 전경. 왼쪽 작은 건물이 고서가 보관돼 있던 농암정사다. [사진 백종하]

귀암고택 전경. 왼쪽 작은 건물이 고서가 보관돼 있던 농암정사다. [사진 백종하]

경북 칠곡군 왜관읍 귀암고택의 솟을대문. [사진 백종하]

경북 칠곡군 왜관읍 귀암고택의 솟을대문. [사진 백종하]

광주 이씨가 이들 고서를 기증한 사연이 흥미롭다.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에 세거하는 석전문중은 4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한 가문이다. 1606년 이윤우를 시작으로 아들 이도장, 손자 이원정, 증손자 이담명이 잇따라 과거에 급제했다. 이 가운데 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1622∼1680)은 숙종 시기 형조와 호조‧공조를 거쳐 이조까지 4개 판서를 두루 지냈다. 이원정 가문에 서책이 많았던 배경이다.

귀암고택에서 최근 이필주(76) 종손을 만났다. 고택을 안내하던 종손은 사당 왼쪽에 위치한 농암정사에 이르러 뒷벽을 가리키며 한 사건을 회고했다.

귀암고택의 농암정사. [사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귀암고택의 농암정사. [사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바로 여깁니다. 80년대 초반 어머니 혼자 고택을 지킬 때 이곳에 있던 서책 수천 권을 도둑이 벽을 뚫고 훔쳐갔어요.”

이후 처리 과정이 극적이다. 도난당한 서책은 대부분 경상북도 지정문화재였다. 사건은 TV 등을 통해 크게 알려졌다. 분실한 서책 중 『용비어천가』,『노걸대언해』 등은 왕이 하사한 이른바 내사본(內賜本)이었다. 『용비어천가』의 첫 장에는 ‘장성부사 이원정에게 하사한다’는 묵서(墨書)와 함께 네모난 붉은 인장이 선명히 찍혀 있다. 책 주인의 이름을 남겨 둔 것이다. 뉴스에 그 사실이 언급됐다.

사건 발생 20여 일 뒤 해당 고서를 소지한 쪽이 수사 진행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경찰에 자수했다. 책을 펴면 맨 앞에 나오는 그 기록을 외면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역의 모 대학으로 책이 가 있었다. 이렇게 첫 장에 누구에게 하사하는 지를 밝힌 기록이 도난 문화재를 찾는 열쇠가 된 것이다. 서울에 살던 종손은 책을 돌려받은 뒤 칠곡군 왜관 사랑방에 두고 지키느라 한동안 비었던 고택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이원정 사후 영의정 증직에 문익공 시호를 내린다는 교지.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이원정 사후 영의정 증직에 문익공 시호를 내린다는 교지.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문중은 이후 이들 서책을 지역 대학에 기증한다. 당시 기증 고서가 넘쳐나던 대학을 피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효성여대(지금의 대구가톨릭대)에 서책 전체를 넘겼다. 문중은 기증할 대학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장물(臟物)을 잡은 대학은 제외시켰다. 효성여대는 어부지리로 희귀본을 확보했다. 대구가톨릭대는 중앙도서관에 ‘석전문고’라 이름 붙이고 이들 고서를 보관하며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골동품점에서 흔히 유통되는 목판에도 예외 없이 한가운데 세로로 책 이름과 쪽수가 새겨져 있다. 어느 집의 목판인지 확인할 수 있는 장치다. 고서에 남은 조상의 검증 지혜라 할 만하다.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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