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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조 사상 최대 예산, 최악 졸속심사로 통과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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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512조3000억원 규모의 초수퍼예산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내년 나랏빚은 처음으로 800조원을 넘어서고, 나라 살림살이를 보여주는 관리재정수지 적자 규모는 올해의 2배 가까이로 늘어난다.

근거없는 간사협, 깜깜이 소소위 #선거 홍보효과 큰 SOC 증액 1위 #늘어난 예산 46%가 복지·고용 #한번 늘면 못 줄이는 경직성 예산

11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내년 예산은 당초 정부안보다 1조2000억원 줄었지만 올해(본예산 기준)보다는 9.1% 늘어난 역대 최대다. 2년째 9%대 증액으로, 증가율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결국 현 정부 출범 이후 3년도 안 돼 112조원이 늘면서 500조원대를 돌파하는 것이다.

반면 ‘눈먼 지출’을 걸러내야 할 예산안 심사는 역대급 ‘깜깜이’로 진행됐다. 증액·감액 심사를 법적 근거도 없는 ‘간사 협의체’로 넘기더니 속기록도 남기지 않는 ‘소소위(小小委)’가 올해도 등장했다. 이마저 여야 정쟁으로 한동안 중단됐다가 예산안 처리 바로 전날에서야 재가동했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사상 ‘최대’의 예산이 사상 ‘최악’의 부실 심사를 거쳐 졸속 통과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2020년 예산 총지출 규모.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2020년 예산 총지출 규모.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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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안을 뜯어보면 내년부터 본격적인 ‘재정 포퓰리즘’의 길을 열어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은 23조2000억원으로 기존 정부 안에서 되레 9000억원이 더 늘었다. 12개 분야 가운데 증액 폭이 가장 크다. 문재인 정부는 과거 정권처럼 토건으로 경기 부양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경기 침체가 이어지면서 결국 손쉬운 경기 부양책인 SOC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여기에 내년 총선을 앞두고 실세 의원들이 지역구의 민원성 SOC 사업을 추가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김태기 교수는 “선거용 현수막이나 홍보물에서 내세울 성과로는 도로나 기반시설 건설 같은 지역 SOC만 한 것이 없다”며 “감시자 역할을 해야 할 야당에서까지 가세하는 구태가 반복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그간 중점적으로 늘렸던 보건·복지·고용 예산은 정부 안보다 1조원 준 180조5000억원으로 확정됐다. 그런데도 지난해와 비교하면 19조5000억원(12.1%)이나 늘었다. 올해 늘어난 예산 가운데 절반가량(46%)이 이 분야에 몰려 있다. 문제는 이 분야의 예산은 한번 늘어나면 좀처럼 줄이기가 어려운 경직성 예산이라는 점이다. 복지라는 이름으로 살포되는 각종 현금 보조금, 고용 지표 개선을 위해 만든 노인 일자리 등이 여기에 속한다. 통계청장을 지낸 유경준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재정의 역할은 인정하지만 지원이 필요한 사람과 필요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 지출해야 한다”며 “지금처럼 국회의 예산 감시 기능이 마비된다면 재정 포퓰리즘이 더욱 확산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세수 증가세가 내년에는 마이너스로 돌아서는 상황에서 재정 건전성 우려도 나온다. 내년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71조5000억원으로 10년 만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3% 선을 넘게 된다. 내년 국가채무도 805조2000억원으로 올해보다 64조4000억원 증가한다. 이에 따라 내년 적자 국채 발행 규모는 약 60조원에 달하는 역대 최대로 예상된다. 나라 곳간에 들어오는 돈은 주는데 나가는 돈은 많아진 탓이다. 박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기 대응을 위한 재정 ‘정책’과 표를 얻기 위한 선심성 재정 ‘포퓰리즘’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면서 “세수 뒷받침 없는 확장 재정은 미래세대의 부담을 늘리고 경제 전체를 비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손해용 경제에디터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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