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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수·유산슬·촌므파탈···B급 감성, 탈권위 캐릭터에 열광,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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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의 메가 히트 캐릭터 펭수. '펭-하'는 '펭수 하이'란 뜻이다. [사진 EBS]

2019년의 메가 히트 캐릭터 펭수. '펭-하'는 '펭수 하이'란 뜻이다. [사진 EBS]

올 한 해 대중문화계에선 새로운 캐릭터의 부상이 두드러졌다. 남극에서 온 펭귄 ‘펭수’를 비롯해 신인 트로트 가수 ‘유산슬’,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촌므파탈’ 주인공 등 뭔가 엉성해 보이는 B급 감성 캐릭터들이 특히 주목받았다. 비주류에서 출발했지만, 기존 권위에 주눅 들지 않고 대세로 우뚝 선 이들의 성장담이 치열한 경쟁 사회의 고달픈 대중에게 위로와 대리만족을 준 한 해였다.  ‘2019 대중문화 히트 캐릭터 5’를 꼽아본다.

2019 대중문화 히트 캐릭터 5

SBS '정글의 법칙- in 순다별도'에 출연한 펭수. [사진 방송캡처]

SBS '정글의 법칙- in 순다별도'에 출연한 펭수. [사진 방송캡처]

#펭수=교육방송 EBS가 어린이 프로그램(‘생방송 톡!톡! 보니하니’)용으로 만든 캐릭터지만 2030 직장인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직통령’ 대접을 받고 있다. 사장 이름까지 거침 없이 부르는 ‘사이다’ 행보 덕이다. 최근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진행한 ‘올해의 인물’ 투표에선 BTS를 누르고 방송연예 분야 1위를 차지했다. “눈치 보지 말고 원하는 대로 살아라. 눈치 챙겨” “다 잘할 순 없다. 잘하는 게 분명 있을 거고, 그걸 더 잘하면 된다” 등이 대표적인 어록.

나이는 열 살, 남극유치원을 졸업한 뒤 우주대스타를 꿈꾸며 뽀로로의 나라 한국으로 왔고, 오는 길에 스위스에 들러 요들송을 배웠다는 등 펭수만의 스토리와 세계관은 젊은 세대들에게 은근한 동료 의식을 심어주며 ‘덕질’을 유도한다. 카카오톡 펭수 이모티콘은 지난달 13일 출시되자마자 판매 1위로 올라섰고, 지난달 29일 예약판매를 시작한 펭수 에세이 다이어리는 아직 출간 전인데도 벌써 10만 부 넘게 팔렸다. 펭수의 유튜브 채널 ‘자이언트 펭TV’의 구독자 수는 11일 현재 128만 명이다.

소속은 EBS지만 펭수의 무대엔 울타리가 없다. ‘아는 형님’(JTBC), ‘정글의 법칙’(SBS) 등에 출연한 데 이어 오는 29일엔 MBC 방송연예대상 시상자로 나선다. KGC인삼공사 정관장의 내년 설 CF 모델로 발탁돼 첫 상업 광고도 찍었다. 안성기ㆍ정해인 등이 거쳐갔던 역할이다.

트로트 가수 '유산슬'로 활동하는 유재석. MBC '놀면 뭐하니?'에서 탄생한 캐릭터다. [방송 캡처]

트로트 가수 '유산슬'로 활동하는 유재석. MBC '놀면 뭐하니?'에서 탄생한 캐릭터다. [방송 캡처]

#유산슬=TV조선 ‘내일은 미스트롯’의 히로인 송가인이 몰고온 트로트 바람이 유산슬로 꽃을 피웠다. 유산슬은 MBC 김태호 PD가 ‘무한도전’ 이후 1년 4개월 만에 방송에 복귀하면서 내놓은 새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 속 캐릭터다. ‘무정형’ 방식을 표방한 ‘놀면 뭐하니?’는 유일한 고정 출연자 유재석이 릴레이 카메라와 드럼 프로젝트 등을 무한도전 식으로 펼치는 프로그램이다.

프로젝트 중 하나인 ‘뽕포유’에서 유재석은 유산슬이란 예명을 받아들고 트로트 가수에 도전했고 결과는 대성공이다.  ‘박토벤’ 박현우, ‘정차르트’ 정경천 등 트로트계 재야 고수들이 어설픈 유산슬을 키워가는 과정이 시청자들에게 일종의 쾌감을 선사한 것. ‘합정역 5번 출구’ ‘사랑의 재개발’ 등의 신곡들은 음원 차트까지 공략 중이다. 유산슬에게도 방송사 경계는 없다. 지난달 18일 KBS1 ‘아침마당’에 출연한 데 이어 오는 18일엔  SBS ‘영재발굴단’ 무대에 선다.

유산슬의 성공은 김태호의 건재와 유재석의 부활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재치있는 진행 실력이 장기였던 유재석은 리얼버라이어티의 전성기가 지나고 관찰 예능이 대세가 되면서 한때 위기론이 불거진 바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김태호 PD는 1인 크리에이터 중심인 유튜브 콘텐트의 틀을 TV 방송에 성공적으로 접목했다. 또 순발력과 친화력, 상대를 배려하는 인성 등 유재석의 장점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KBS2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촌므파탈' 남주인공 용식(강하늘). [방송캡처]

KBS2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촌므파탈' 남주인공 용식(강하늘). [방송캡처]

#촌므파탈=올 하반기 최고 히트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KBS2)의 남주인공 용식(강하늘)을 가리키는 ‘촌므파탈’은 ‘촌스러움’과 ‘옴므파탈’의 합성어다. 촌스러우면서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남자를 뜻한다. 충청도 사투리를 진하게 쓰는 용식은 전문직도, 재벌 2세도, 나쁜남자도 아니다. 출생의 비밀이나 불치의 병 등 돌발 상황과도 관계가 없다. 극 중 상대역인 여주인공과도, TV 밖 시청자와도 ‘밀당’이 전혀 없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여주인공을 좋아하고 인정하고 지지한다. 드라마 속 남주인공으로선 전에 없던 캐릭터다. 자신이 좋아하는 동백(공효진)에게 “내가 내 여자를 귀하게 모셔야 남들도 함부로 못하는 것”이라며 “손을 안 잡겠다”고 선언하는 모습도 촌스러움 그 자체다. “동백씨 손을 닭발이나 우족이다 생각하면 된다”니, 낭만과는 거리가 먼데도 그의 남성적 매력은 도리어 더 부각됐다.

‘촌므파탈’의 부상은 ‘잘났지만 피곤한 남자’ 대신 ‘못나도 편안한 남자’에 대한 대중의 판타지가 더 크다는 방증이다. 여주인공의 해결사로 나서지 않는 것도 ‘촌므파탈’ 용식의 특징이다. 연쇄살인범 까불이를 잡는 일도 결정적인 역할은 동백에게 ‘양보’한다. “동백씨는 내가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동백씨는 동백씨가 지킨다”는 용식의 내레이션은 ‘민폐’형 여주인공 캐릭터를 질색하는 시대 감성과도 맞아 떨어졌다.

유튜브 채널 '워크맨'에서 아르바이트 체험에 나선 장성규. [유튜브 캡처]

유튜브 채널 '워크맨'에서 아르바이트 체험에 나선 장성규. [유튜브 캡처]

#선넘규=‘선 넘는 장성규’의 줄임말. ‘선 넘는’은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 장성규에게 붙어다니는 수식어다. 2011년 JTBC 공채 1기 아나운서로 입사해 30여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다작 MC’ 반열에 올랐던 장성규는 진행자로서 특A급은 아니었다. 하지만 올 4월 프리 선언을 한 뒤 7월 론칭한 유튜브 채널 ‘워크맨’을 통해 독보적인 예능감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TV보다 자유로운 웹 세상에서 말장난의 수위가 훨씬 높아졌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 체험 형식의 ‘워크맨’에서 장성규는 아슬아슬 선을 넘나들며 웃음을 끌어낸다. 때론 비속어까지 쓰며 불쾌감과 해방감 사이의 줄타기에 몸을 사리지 않았다. 또 메가박스에서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롯데시네마를 언급하는 등 사회 통념을 깨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5개월 만에 구독자 350만을 돌파한 ‘워크맨’은  2019년에 신설된 전세계 유튜브 채널 중 구독자 수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선넘규’ 캐릭터 덕에 진행자로서 장성규도 대세로 떠올랐다. 지난 9월 MBC FM4U ‘굿모닝 FM 장성규입니다’의 DJ로 발탁된 데 이어 KBS 2TV ‘슬기로운 어른이 생활’, MBC ‘오! 나의 파트, 너’ MC까지 꿰찼다.

영화 '타짜1'의 곽철용(김응수). OCN 디지털 스튜디오 '뭅뭅'이 유튜브에 올린 '곽철용 명대사 모음' 동영상 중 한 장면이다. [유튜브 캡처]

영화 '타짜1'의 곽철용(김응수). OCN 디지털 스튜디오 '뭅뭅'이 유튜브에 올린 '곽철용 명대사 모음' 동영상 중 한 장면이다. [유튜브 캡처]

#곽철용=2019 히트 캐릭터 중 가장 뜬금없는 방식으로 부상한 캐릭터다. 곽철용은 2006년 개봉한 영화  ‘타짜1’에서 배우 김응수가 연기한 인물이지만, 올 상반기까지만 해도 대중에게 생소한 이름이었다. 조승우ㆍ유해진ㆍ김혜수ㆍ백윤식 등이 출연했던 ‘타짜1’에서 곽철용의 존재감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올 추석 무렵 ‘타짜3’가 개봉하면서 곽철용은 13년 만에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타짜1’이 훨씬 재미있었다는 여론이 대중의 숨은 영웅 찾기 심리를 자극한 것. 특히 고니(조승우)와의 도박판에서 곽철용이 한 대사 “묻고 더블로 가”는 유행어로 떠올랐고, 각종 패러디의 대상이 됐다. 배우 김영철의 드라마 ‘야인시대’ 시절 대사 ‘사딸라’가 지난해 갑자기 돌풍을 일으킨 것과 유사한 현상이다.

“나도 순정이 있다” “젊은 친구, 신사답게 행동해” 등 남자다움을 장난스럽게 드러낸 곽철용의 대사는 신세대의 탈권위 감성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새삼 대세 스타로 떠오른 김응수는 BBQ 치킨과 버거킹 광고 모델로 발탁돼 곽철용 캐릭터를 광고에서 재현했다. 또 최근엔 래퍼 머쉬베놈의 신곡 피처링에도 참여해 “가오 묻고 멋 따블로 가”라며 곽철용 캐릭터로 랩을 구사했다.

곽철용 신드롬은 유튜브 등을 통해 옛날 콘텐트를 즐기는 신세대 문화 트렌드와도 관련이 깊다. 1980, 90년대 TV 가요 프로그램을 다시 보여주는 ‘어게인 가요톱10’ ‘SBS K팝 클래식’ 등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유튜브 채널이 인기를 끄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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