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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건 무대 뒤에서 보낸 긴 시간"

중앙일보

입력

지휘자 김은선은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최초의 여성 음악감독으로 선임됐다. [사진 Marc Olivier Le Blanc,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지휘자 김은선은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최초의 여성 음악감독으로 선임됐다. [사진 Marc Olivier Le Blanc,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나는 오페라 무대 뒤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 무대 뒤에서 일어나는 일을 안다. 아마 오페라단 사람들이 그걸 느낀 게 아닐까.”

지휘자 김은선(39)은 1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오페라단 스태프들과 회의를 마치고 전화를 받았다. 1923년 설립된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는 미국의 중요한 오페라단 중 하나로 꼽힌다.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 게오르그 솔티가 미국 오페라 데뷔를 샌프란시스코에서 했다. 마리오 델 모나코, 티토 고비 같은 세기의 성악가들도 이 오페라 무대를 통해 미국에 데뷔했다. 김은선은 5일(현지시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네 번째 음악 감독으로 임명됐다. 5년 임기가 2021년 시작된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김은선 음악감독 #미국 메이저 오페라 최초 여성 지휘자

샌프란시스코 임명 전부터 그는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고 있었다. 마드리드의 왕립극장에서 여성 최초로 지휘대에 올랐고, 베를린ㆍ프랑크푸르트ㆍ드레스덴 오페라 극장에 여러 차례 초청됐다. 미국 신시내티의 5월 축제에서는 145년 역사상 첫 여성 지휘자로 무대에 섰다. 김은선은 한국에서 대학원까지 마치고 24세에야 독일에 유학을 갔던 여성 지휘자다. 그는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다음은 일문일답.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와 지난 6월 한 번 공연한 후 임명됐다.

“이례적인 것은 맞다. 사실 공연은 한 번이었지만 그 공연을 준비하며 7주를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냈다. 한 번 지휘해보고 서로 맞는 걸 알게 된 것이 아니고 리허설, 미팅, 쉬는 시간까지 모든 단원, 스태프와 함께 보내면서 알게 됐다.”

6월에 이미 다음 지휘자를 찾고 있었다고 하던데.

“내가 공연할 때 차기 음악감독을 찾으면서 오페라단의 전 직원, 오케스트라 단원, 합창단, 사무실 직원, 무대 스태프까지 모두에게 설문 조사를 했다고 한다. 나뿐 아니라 모든 객원 지휘자에 대해서 설문을 무기명으로 진행했다고 하는데 나는 까맣게 몰랐다.”

어떤 평가를 받았다고 하나.

“나는 무대 뒤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마드리드에서 부지휘자 생활을 2년 했다. 그 뒤에도 다니엘 바렌보임, 키릴 페트렌코 같은 명지휘자를 찾아다니며 리허설을 다 지켜봤다. 관객이 보는 건 무대 위 가수, 아니면 무대 밑의 오케스트라 정도이지만 그 뒤에 몇백명의 사람들이 있다. 그 뒤를 아는 지휘자와 모르는 지휘자를 오페라 스태프들은 금방 구분한다.”

바렌보임, 페트렌코 같은 지휘자에게는 어떻게 배울 수 있었나.

“지금도 소속돼 있는 에이전시(Arsis)가 연결해줬다. 마드리드에서 부지휘자를 하던 마지막 해에 소프라노 데보라 폴라스키가 공연을 왔다가 내가 일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매니저를 만나보라고 했다. 그 후에 뛰어난 지휘자들의 부지휘자로 일하면서 배울 수 있었다.”

일류 음악가들이 있는 에이전시인데 무명의 지휘자와 한 번에 계약한 이유가 뭘까.

“매니저를 처음 만났을 때 너는 여자고 동양인이고 너무 어리고 키도 작다고 했다. 인내심이 있느냐고 묻더라. 약점이 넷이나 있으니 남들보다 4배 이상 노력하고 잘해야 같은 출발선에 겨우 설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아주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에이전시가 큰 무대에 갑자기 세워주고 하는 게 아니라 좋은 지휘자들에게 배울 수 있도록 연결을 해줬다.”

어떻게 노력했나.

“무엇보다 음악은 언어다. 그런데 나는 대학원 졸업하고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유학 갔으니 24세 이후에 외국어를 배웠다. 작곡가의 뉘앙스가 나라마다 정말 다른데 나는 그걸 정확히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외국 오케스트라가 한국에 와서 아리랑을 앙코르로 연주하면 어딘가 2% 부족한 것처럼. 무엇보다 언어 공부를 매일 했다. 푸치니, 차이콥스키, 베토벤을 하면 공연에 앞서 그 나라 언어인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독일어로 생각하고 말한다. 휴대전화에 나오는 언어까지 외국어로 바꾸고 뉴스도 그 나라 언어로만 본다. 오페라뿐 아니라 교향곡을 지휘할 때도 마찬가지다.”

공연 이력을 보니 한 번 초청된 도시에서 반드시 또 불렀다.

“한 두 군데를 빼고는 다시 초청됐다. 내가 잘했다기 보다는 오케스트라와 서로 잘 맞는 게 중요하다.”

지난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드보르자크 오페라 '루살카'를 공연했던 지휘자 김은선(왼쪽 셋째). [사진 Marc Olivier Le Blanc,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지난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드보르자크 오페라 '루살카'를 공연했던 지휘자 김은선(왼쪽 셋째). [사진 Marc Olivier Le Blanc,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여러 도시를 다니고 수많은 오케스트라 단원을 만났다. 동양인 여성 지휘자에 대한 태도는 어떤가.

“차별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걸 많이 신경 안 쓰는 성격이다. 어떤 사람이 까탈스럽게 굴었을 때 무조건 내가 여자라 그랬다 생각하지 않고 해석의 차이부터 돌아본다. 그것도 아니면 그 사람이 아침에 부인이랑 싸웠나 이렇게 생각하고 넘긴다. (웃음) 모두가 젊은 여성이 수백년 된 오케스트라를 이끄느라 힘들었겠다고 말씀해주시는데, 사실 음악이 시작되고 나서는 음악가와 지휘자는 음악 얘기밖에는 할 게 없다. 내가 내 앞에 있는 플루트 단원을 여자 플루트 단원이라고 생각하지 않듯이, 음악이 시작되면 단원들도 나를 그냥 지휘자로 본다. 단원들이 까탈스러우면 거기에서 배우면 된다.”

지휘자의 태도에 대해서는 어디에서 가장 많이 배웠나.

“연세대에서 최승한 교수님에게 많이 배웠다. 지휘자가 아무리 팔을 저어봤자 어떤 소리도 직접 낼 수 없고, 연주자들이 소리내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는 것을 배웠다. 내가 작곡 공부를 할 때 지휘를 권해주셨던 분이기도 하다.”

앞으로 어떤 무대가 있나.

“다음 달 LA 오페라, 내년 뉴욕 필하모닉과 빈 국립극장에 데뷔한다. 2021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뷔하고 스케줄은 2023년까지 잡혀있다. 그동안 항상 교향곡 지휘도 많이 해왔는데 이상하게 오페라 지휘만 부각이 됐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 대한 계획은 어떻게 그리고 있나.

“목표는 오페라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는 올해부터 인종과 성별에 상관없이 다양성을 포용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내가 마침 미국 사람이 아니지 않나. 2022년에 100주년 행사를 하는데 다양하고 즐겁게 작품들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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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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