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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혐오는 500여년 전 마녀사냥과 다를 바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광주에서 열린 제2회 광주퀴어문화축제에서 참가자들이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갯빛 깃발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지난달 광주에서 열린 제2회 광주퀴어문화축제에서 참가자들이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갯빛 깃발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한국에서 사는 대다수 사람은 주민등록번호를 갖고 있다. 13자리 숫자의 조합으로 이뤄진 주민등록번호의 뒷부분은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게 되어 있다. 단순히 행정적 편의를 위해 생겨난 것이지만, 이 번호가 시사하는 사회적 함의는 작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반드시 한가지 성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성소수자연구회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출간

무엇이 성별을 결정하는가?

하지만 성별을 판단하는 기준은 간단치 않다. 19명의 한국성소수자연구회가 펴낸 신간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창비)에 따르면, 현대 의학에서는 한 사람의 성별을 결정하는데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한다. 염색체, 내외부 생식기, 호르몬, 성별 정체성 등이 관여하는데 이 가운데 많은 요소가 후천적으로 변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성별을 남녀로 나누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전 세계적인 흐름이기도 하다.

"한국 성소수자 인권은 제자리걸음" 

한국성소수자연구회는 "하지만, 한국사회의 현실은 참담하다"고 진단한다. 한국의 인터넷 공간에는 성소수자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를 담은 게시물이 셀 수 없이 많고, 누적된 사회 불만을 성소수자 탓으로 돌려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책의 서문에서 "한국의 근대화는 구성원 한명, 한명의 인권이 승인되어온 과정이었지만, 최근 한국사회의 성소수자 혐오는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른다"고 적었다.

10일 서울 마포구 창비 서교빌딩에서 열린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는 저자 일부가 참석했다.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오늘(12월 10일)은 1948년 유엔에서 제정한 세계인권선언기념일"이라며 "기념일이 제정된 지 70년 가까이 됐지만, 여전히 성소수자 인권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고, 차별금지법 등은 제정되지 않고 있다. 국제기준에 따르지 못하고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국내 현실이 조금이라도 바뀌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주민등록번호가 누군가에게는 지독한 낙인이자 차별의 근거가 된다고 책에 적었다.

박한희(가운데) 변호사는 "성소수자에 대한 인권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고, 차별금지법 등 관련 법들이 제정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진 창비]

박한희(가운데) 변호사는 "성소수자에 대한 인권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고, 차별금지법 등 관련 법들이 제정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진 창비]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것인가?

책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다룬 최훈 강원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는 "성소수자 혐오는 노인, 외국인 혐오 등과 달리 '그냥 싫다'는 게 혐오의 이유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성소수자들이 혐오자들의 혐오에 대응할 때에는 합리적인 논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가 밝힌 혐오자들의 대표적 오류는 '자연주의의 오류'다. 성소수자가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은 자연스러움에서 규범을 끌어내려는 오류에 빠진 결과라는 것이다. 자연스러움은 자연스러움으로 끝나는 것이지 거기서 어떤 옳고 그름을 끌어낼 수 없다. 그는 "성소수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 옳고 그름의 규범을 도출할 수 없다"며 "만약 아이를 낳지 못한다 해서 옳지 않다고 한다면 이 세상의 불임 부부는 모두 비난을 받아야 한다"고 책에 적었다.

"근본주의 교리가 다양한 이야기 곡해"

성소수자 혐오의 극단에 서 있는 그리스도교의 모순과 폭력성을 고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자캐오 대한성공회 용산나눔의집 관할 사제는 "오늘날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 선동은 500여년 전 마녀사냥과 다를 바 없다"며 "그리스도교 주류 집단은 시대가 바뀌고 자신의 위상에 불안과 공포를 느낄 때마다 상대적 약자와 사회적 소수자에 책임을 떠넘기기를 반복하며 위기를 모면해왔다"고 주장했다.

일부에선 성경이나 교리를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근거로 든다. 이에 대해 그는 "우리는 근본주의 교리에서 벗어나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며 "우리의 한계보다 더 풍성하고 다양한 (성경) 이야기를 자꾸 우리 한계 안에서 곡해하면 안 된다"고 밝혔다. 그는 책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신의 초대가 사랑과 연대, 다양성과 교차성의 길로 우리를 이끈다는 것뿐이다."

자캐오(맨 왼쪽) 사제는 "교회에서 목사들이 신자들에게 혐오와 차별을 가르친다면 반박하는 질문을 통해 잘못을 일깨워야 한다"고 밝혔다. [사진 창비]

자캐오(맨 왼쪽) 사제는 "교회에서 목사들이 신자들에게 혐오와 차별을 가르친다면 반박하는 질문을 통해 잘못을 일깨워야 한다"고 밝혔다. [사진 창비]

"성적 지향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김승섭 고려대 일반대학원 보건과학과 교수는 의학적 근거를 통해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며, 성적 지향은 선택사항이 아니라고 말한다. 1973년 미국정신의학회는 동성애가 정신병이 아니라는 내용의 공식입장을 표명했고, 이후 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한 여러 단체가 수차례 성명서나 보고서를 발간해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개인의 성적 지향도 아동기 초기에 형성돼 개인이 인지하게 되는 10대면 이미 선택할 수 없게 된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또한 동성애가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의 원인이 아니라는 근거도 책에서 조목조목 제시한다. 그는 "혐오와 낙인은 한국의 HIV 신규 감염을 부추기고 더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며 "한국 사회의 HIV 감영 확산을 막기 위한 첫걸음은 혐오와 사회적 낙인을 거두고 그 바이러스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성소수자연구회 내년 1월 정식 출범 

이밖에 각 분야 전문가 19명이 참여한 이 책은 성별 이분법을 벗어나 트랜스젠더, 젠더퀴어, 인터섹스 등 다양한 성별 정체성에 대해 소개한다. 이어 이분법적인 사회에서 차별받는 이들이 꿈꾸는 또 다른 대한민국은 가능한지 되묻는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는 "인터넷상에는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부정확한 정보가 널려 있는 데 반해 성소수자 관련 전문서적은 전무한 상태"라며 "외국 서적이나 학술서를 보기에는 어려운 독자들을 대상으로 학술적이지만 대중적인 책을 지향해 만들어졌다"고 소개했다.

이번 책 출간과 함께 한국성소수자연구회도 본격적인 활동에 나설 계획이다. 이 연구회는 국내에서 성소수자 인권 등 문제 전반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첫 번째 학술단체다. 임시 대표를 맡은 홍성수 교수는 "성소수자 관련 연구자를 모아 같이 교류도 하고, 지식을 공유·확산하고자 한다"며 "내년 1월 정식으로 학회 출범을 알리는 행사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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