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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곳만 '대우' 간판 걸어놓고 있다···해체 19년, 김우중의 유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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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중앙포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중앙포토

대우그룹은 2000년 공식적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후 계열사는 뿔뿔이 흩어지고, 몇 군데에 빼곤 '대우' 사명조차 없다. 그나마 대우의 간판을 유지한 대우조선해양·대우건설 등은 산업 구조 변화와 경기 침체로 고전 중이며, 대우가 남긴 유산인 자동차·조선 등에 들어간 혈세만 해도 수조원에 달하는 등 아직도 진행형이다. 대우가 걸어온 굴곡진 역사는 계속되는 셈이다.

대우인터내셔널이 우즈베키스탄에 설립한 공장. 중앙포토

대우인터내셔널이 우즈베키스탄에 설립한 공장. 중앙포토

대우그룹은 김우중 전 회장이 1967년 설립한 섬유회사 대우실업에서 출발했다. 이후 건설·증권·중공업·금융 등 전방위로 영역을 확장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1990년대 이후엔 세계로 진출했다. 덕분에 1990년대 말엔 삼성그룹을 제치고 현대그룹에 이어 재계서열 2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1999년 워크아웃 이후 대우는 대우건설과 대우인터내셔널로 쪼개지고, 그룹의 주력 사업인 대우자동차는 미국 GM에 매각됐다. 이후 대우인터내셔널은 포스코그룹에 넘어갔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샐러리맨 출신으로 한국경제가 어려웠던 시절에 발전 모델을 제공했다는 점과 종합상사 모델 비즈니스를 개척한 일은 공으로 볼 수 있다”면서도“무리한 인수합병으로 한국경제에 무리를 준 건 과"라고 말했다. 이어 "남은 대우 계열사 중에서도 당시 오너십을 갖고 변화한 곳은 나쁘지 않지만, 정부 보호 아래 있는 부실기업은 상황이 좋지 않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우중 대우그룹 출범에서 해체까지.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김우중 대우그룹 출범에서 해체까지.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지금까지 사명에서 대우를 떼지 않은 곳은 대우조선해양·미래에셋대우·대우건설·위니아대우 정도다. 위니아대우를 제외한 3곳은 각각 조선·금융·건설 업종 톱3에 들어가는 규모 있는 기업이다. 또 4개 기업의 지난해 매출은 약 21조원(미래에셋대우는 수수료 수익)으로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

그룹의 모태인 대우실업은 국내 최대의 종합상사인 포스코인터내셔널로 성장했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의 지난해 매출(연결 기준)은 25조원으로 삼성물산 상사부문이나 SK네트웍스 상사·무역부문보다 크다. 인수 당시(16조원)보다 50% 이상 늘었다. 종합상사로서 대우가 심은 '글로벌 경영'이라는 정체성을 이어받은 셈이다. 2010년 대우인터내셔널을 인수한 포스코는 수년간 대우가 들어간 사명을 유지했지만, 지난 3월 꼬리표를 뗐다.

대우자동차가 군산항에서 누비라를 선적하고 있다.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회]

대우자동차가 군산항에서 누비라를 선적하고 있다.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회]

대우자동차는 그룹의 주력 사업이었다. 국민차로 오랫동안 사랑받은 티코·마티즈를 비롯해 르망·에스페로·라노스·누비라·레간자·아카디아 등 인기 모델을 선보이며, 현대자동차와 함께 자동차 산업을 이끌었다. 1991년 출시한 티코는 당시 사회초년생의 첫차로서 독보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룹 해체 후 2002년 미국 GM이 대우자동차를 인수했다. 새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대우자동차'의 명맥은 유지했다. 그러나 GM은 대우 브랜드에 대한 부정적 인상 등을 고려해 2011년 대우를 빼고 한국GM으로 사명을 바꿨다.

김우중 전 회장의 못다 핀 꿈은 대우자동차가 한국GM으로 넘어간 후에도 꽃피우지 못했다. 한국GM은 지난해 생산물량 감소를 이유로 군산공장을 폐쇄했다. 이후 GM의 한국 철수설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급기야 산업은행은 한국GM을 붙들기 위해 지난해 공적자금 8000억원을 투입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말 창원공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560명도 '해고 통지서'를 받았다. GM이 한국서 철수한다면 대우자동차가 남긴 유산은 역사로만 남게 된다.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중앙포토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중앙포토

김 전 회장은 1978년 대한조선공사 인수해 조선업 등 중공업 성장을 주도했다. 그래서 대우조선은 한때 한국 제조업을 상징하기도 했다. 골리앗 크레인에서 제작한 초대형 선박은 세계로 뻗어 나가는 대우그룹과 한국 경제가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대우조선해양은 여전히 골리앗의 풍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대우조선해양은 매출 9조6443억원을 올렸으며, 올해 수주액은 57억 달러(약 6조7000억원)를 기록했다. 조선업 호황기에 비하면 수주액이 절반에도 못 미치지만, 여전히 현대중공업에 이어 세계 2위 조선사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이 현저히 줄어든 가운데,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은 경쟁력 강화를 위해 지난 1월 기업결합을 선언했다. 세계 1·2위 조선사의 결합은 유럽·일본 등 경쟁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업계는 최근 일본·중국의 대형 조선소 간 합병이 이뤄진 점으로 볼 때 성사될 것으로 전망했다.

기업결합이 되면 대우조선해양도 '대우'라는 이름이 빠질 가능성이 크다. 업계 관계자는 "당장 사명이 바뀌진 않겠지만, 포스코인터내셔널처럼 2~3년 후에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는 "현대중공업이 별도 회사로 운영한다고 말해 갑자기 이름이 바뀌진 않을 것”이라며“그동안 대우라는 이름으로 만든 배가 브랜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우조선해양이라는 사명은 산업은행이 대주주가 된 후 2002년 해양 사업 분야가 포함되며 바뀌었다.

대우건설이 시공한 리비아 최대규모의 병원. 중앙포토

대우건설이 시공한 리비아 최대규모의 병원. 중앙포토

대우건설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모토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기업이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 등으로 대표하는 김 전 회장의 신화와 같은 에피소드를 간직한 계열사다. 대우건설에 따르면 1986년부터 5년 동안 대우건설이 리비아에서 수주한 공사 금액은 19억2400만 달러(약 2조3000억원)였다. 1986년 한국 정부 예산이 13조8500억원이었던 점에 비하면 엄청난 달러를 벌어들인 셈이다.

파키스탄 사람 중엔 이슬라마바드-라호르 고속도로를 '대우 고속도로'라는 부르는 사람이 많다. 파키스탄 최초의 고속도로를 대우건설이 수주해 시공했으며, 그 위를 대우자동차가 만든 고속버스가 달렸기 때문이다.

대우건설은 1973년 김 전 회장이 영진토건의 영업권을 인수해 직원 12명으로 세운 회사다. 워크아웃 이후 주인이 세 차례나 바뀌었지만, 인수자는 대우라는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여전히 국내외 시장에서 대우건설이라는 브랜드 가치가 주는 영향력이 있기 때문이다. 산업은행이 지분 100%를 갖고 있다.

대우전자는 2006년 파산 후 워크아웃과 매각을 거쳐 대우일렉트로닉스, 동부대우전자로 이름을 바꾸면서도 '대우'는 유지했다. 그러다 지난해 대유위니아그룹이 대우전자를 인수하면서 현 사명인 '위니아 대우'를 쓰고 있다.

워크아웃 이후 대우중공업에서 떨어져 나온 대우종합기계는 2005년 두산그룹에 넘어가며 두산인프라코어로 거듭났다. 근래 국내 건설기계 업황 부진과 미·중 무역 분쟁, 신흥국 경기불안으로 날개를 펴지 못하고 있다.

김영주·김효성 기자 humane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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