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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의 한국 진보 작심비판 "그들 민주주의는 전체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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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19주년 기념식 및 학술회의'에서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뉴스1]

최장집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19주년 기념식 및 학술회의'에서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뉴스1]

“민주주의의 가장 위험한 적대자는 스스로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본인이) 투쟁한다고 확신하는 이들이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9일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다. 위기의 본질은 한국진보의 도덕적, 정신적 파탄”이라며 진보 세력을 맹비난했다. 이날 오후 1시 30분부터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19주년 학술회의’ 기조 강연문 ‘한국민주주의의 공고화, 위기, 새 정치질서를 위한 대안’을 통해서다. 그는 “(집권 세력이) 민주화 이전으로 회귀해 역사와 대결하는 것이 근본 원인”이라며 “적폐 청산 열풍은 민주화 이전의 민주주의관으로 회귀했음을 말해준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민주주의 위기의 상징적 장면으로 10월 ‘조국 사태’ 당시 광화문과 서초동에서 있었던 조국 찬반 집회를 꼽았다. 그는 두 집회를 종교전쟁에 빗대면서 “두 집회의 군중들 사이의 진리는 결코 같다고 할 수 없다. 이런 격렬한 정치 갈등의 조건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공정한 사법적 결정이 가능할 수 있을지 실로 의문”이라고 했다. 법원 판결이 내려져도 어느 한쪽이 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갈등이 심화했다는 의미다.

“민주주의 위기의 시작은 이명박 정부 때부터”

최장집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19주년 기념식 및 학술회의'에서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뉴스1]

최장집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19주년 기념식 및 학술회의'에서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뉴스1]

최 교수는 이같은 현상을 최근 벌어진 현상으로 진단했다. 1987년 제도적 민주화를 이룬 뒤 김영삼(YS)ㆍ김대중(DJ) 두 전직 대통령을 거치면서는 민주주의가 공고하게 다져졌다고 봤다. 최 교수는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이해하고 가치나 이상을 추구하기보다 현실 속에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정부 형태로서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최 교수가 긍정적으로 평가한 게 ‘DJP 연합’이다. 그는 “DJP 연합은 단순한 정치연합의 범위를 훨씬 벗어난다. 정치연합의 상대가 군부독재의 원조(김종필 전 국무총리)”라며 “DJ는 과거 갈등을 되풀이하는 게 더 큰 갈등을 불러들이는 것 말고 얻을 게 없다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꿰뚫어 봤다”고 했다. 또 “햇볕정책 추진, 금융위기ㆍ노동문제ㆍ한일관계 등 각종 현안을 풀어나가는 데 연합으로 인한 넓은 정치적 기반의 역할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고 했다. YS의 3당 합당을 두고도 “민주화 운동론을 민주적 통치론으로 대체했다”고 평가했다.

“위기의 시작은 이명박(MB) 정부 때부터”라는 게 최 교수의 시각이다. 그는 “MB정부가 앞선 진보적 두 정부(김대중ㆍ노무현 정부)의 기본 정책들을 전면적으로 뒤엎는 정책을 폈을 뿐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간 검찰수사가 패자(敗者)의 존립 자체를 위협했다”고 했다. 그러자 “진보파들은 제도권 밖 시민사회를 조직ㆍ동원하는데 사활을 걸었고, 문성근의 100만 민란운동 등 ‘좌파 포퓰리즘 운동’이 분출됐다. 이러한 흐름이 문재인 정부를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선악 구도 집중하는 운동론적 민주주의관”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19주년 학술회의에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김대중과 민주주의 : 사상과 실천'을 주제로 기조강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19주년 학술회의에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김대중과 민주주의 : 사상과 실천'을 주제로 기조강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 교수는 “민주화를 주도했던 운동세력들의 다수가 ‘운동론적 민주주의관’의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운동권 학생들이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정치계급’이 됐다”며 "현실의 경험적 생활세계를 뛰어넘어 이성적으로 정치와 사회를 디자인할 수 있다는 정서적 급진주의를 내면화한 ‘최대 정의적’(maximalist) 민주주의 이해방식을 발전시켰다"고 했다. 군부 독재라는 ‘절대악’이 분명했던 과거 경험에 따라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선과 악 등의 대립 항을 통해 민주주의를 이념의 형태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이와 함께 "자유주의적ㆍ헌법주의적 전통이 약한 대신 ‘인민민주주의’적 민주주의관이 강한 한국 민주화의 특성"에도 주목했다. 이같은 맥락이 더해지면서 현재 진보세력 내에서 언급되는 ‘직접 민주주의’가 전체주의와 유사해질 수 있다고 그는 경고했다. 최 교수는 "다원적 통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가 누락되고 직접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로 이해하고, 모든 인민을 다수 인민의 ‘총의’에 복종하도록 강제하는 틀은 전체주의와 동일한 정치체제"라고 했다.

사례로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대담집 『진보 집권플랜』에 드러난 정치관을 언급했다. 최 교수는 "진보 대 보수, 개혁 대 수구 등 확실한 구분과 치열한 투쟁, 권력 쟁취를 지향하는 경향이 독일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의 정치이론과 깊숙이 접맥된다"고 봤다. 칼 슈미트(1888~1985)는 전체주의적 국가 ㆍ 정치관을 주장해 나치에 중요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거로 악명이 높은 학자다.

또 최 교수는 청와대가 앞장선 2018년 헌법개정 시도도 비판했다. "대통령이 한국사회를 민주ㆍ개혁파들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개혁의 조타수로 이해하는데, 이는 운동론적 민주주의관의 결과물"이라고 했다. 이어 “국회가 아니라 청와대 민정수석이 개헌안을 발표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다”고 부연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가장 위험한 적대자들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본인이) 투쟁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행위자들”(후안 린츠)이라는 경구를 인용했다.

"386 진보라 할 수 있나. 시민사회도 전면적으로 정치화"

민주주의 위기의 배경으로 최 교수는 대선 캠프를 중심으로 권력 핵심부가 구성되는 '캠프 정치'를 지적했다. 그는 "의회 민주주의 등 민주적 기본질서를 초월한 청와대가 한국의 정치를 권위주의 쪽으로 이끈다"고 했다. 그러면서 "과거처럼 개혁을 주장하지만, 그 결과는 '정부가 정당하다'는 것이다. 정부가 개혁의 기수가 되기 때문에 모든 걸 국가 권력을 통해 추진하면서 다원성을 허용하지 않는다"라며 "(그 결과) 관제 시민운동, 관제 개혁 등 관이 중심이 되는 현상을 만난다"고 했다. 강연 마지막에 최 교수는 86 운동권 정치인들을 겨냥해 "더 이상 진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최 교수는 또 "위기의 중심에는 시민사회도 있다"며 시민단체도 비판했다. "(2016년) 촛불집회 이후 전면적으로 정치화하며 변질됐다"며 "국가로부터의 자율성이 본질이지만, 국가권력에 의해 동원돼 국가의 지지 기반 창출에 보조적 역할을 하는 게 오늘날의 시민사회"라고 했다. 이같은 지적에 토론자들은 “시민단체들이 정치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도 봐야 한다”(김선욱 청암재단 이사장) “정치화되고 갈라진 건 사실이지만 완전히 동원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임현진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등 반론도 나왔지만 최 교수는 조국 사태 당시 시민단체들의 대응을 거론하며 비판 수위를 낮추지 않았다.

한영익 기자 hany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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