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실리콘밸리, 판교 #췌장암 치료 힘든데 발견 쉽잖아 #JW바이오, 초기환자 표지자 연구 #“현재 혈액으로 진단율 90% 넘어 ” #해외서도 아직 상용화한 곳 없어
3일 서울 가산디지털단지 내 JW바이오사이언스의 한 연구실. 연구실 내부는 정적이 감돌았다. 연구용 스포이드를 손에 든 박지은 연구원이 분석용 플레이트에 한 번에 수십 가지의 액체를 조심스레 옮겨 담았다. 혈액 속 항원·항체 반응을 이용해 특정 질병에 걸렸는지 알아보는 과정이다. 이 연구실에선 췌장암에 걸리면 나타나는 물질인 'CFB'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고 있다. 쉽게 말해 CFB가 검출되면 췌장암에 걸렸을 확률이 높다고 보면 된다. 분석은 고도의 기술과 집중을 필요로 한다. 그런 만큼 하루 2~3회 정도의 분석만 가능하다고 했다.
유상철 프로축구 인천유나이티드 감독이 췌장암 4기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췌장암에 대한 관심이 높다. 세계 최초로 췌장암 조기진단 키트를 개발하는 현장을 중앙일보가 둘러봤다.
췌장은 길이 15㎝의 가늘고 긴 장기로 췌액이라 불리는 소화액을 분비해 십이지장으로 보내준다. 하지만 여러 장기에 둘러싸여 몸 안쪽에 깊숙이 있다 보니 췌장암은 조기 발견이 어렵다.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절제 수술도 힘들다. 그래서 암이 발견되더라도 환자의 70~80%는 이미 수술이 불가능한 상태다.
하지만 환자는 꾸준히 늘고 있다. 8일 중앙암등록본부에 따르면 2016년 새로 발병한 암(22만9180건) 중 췌장암이 6655건(2.9%ㆍ전체 암 중 9위)에 달한다. 2014년 1만3615명이던 환자 수 역시 지난해 1만9548건으로 69%가 늘었다.
찾을 수 있을까
췌장암을 초기에 찾아내기란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아내기처럼 어렵다. 일단 환자 개인이 자각할 수 있는 초기 증상이 많지 않다. 다른 암과 달리 건강검진으로도 잡아내기 어렵다. 암에 걸리면 혈액 속 성분변화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종양 표지자(CA 19-9) 검사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는 1980년대에 개발된 기술인 데다, 초기 췌장암 환자에게는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표지자로 이용되는 CA 19-9라는 단백질 분자가 주로 3기 이후 환자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JW바이오사이언스의 조기진단 키트가 학계의 주목을 받는 건 새로운 종양 표지자인 CFB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이 물질은 초기 췌장암 환자에게서도 비교적 잘 검출된다. 때문에 CFB와 CA 19-9의 두 가지 표지자를 동시에 활용하면 그만큼 초기 췌장암 환자를 쉽게 진단해 낼 수 있다. 췌장암에 걸리면 혈액 속 CFB란 성분이 늘어난다는 사실은 연세대학교 백융기 언더우드 특훈 교수팀이 세계 최초로 발견해 냈다. JW홀딩스는 연구팀으로부터 관련 기술을 사들였다. JW홀딩스는 이 기술로 2016년 국내 특허에 이어 일본(2018년), 중국·유럽(2019년)에서 특허를 취득했으며, 미국엔 특허를 출원한 상태다. 덕분에 췌장암 조기진단 키트 개발과 관련해선 가장 앞서 있다는 평을 받는다.
앞으로 3~4년
늦어도 2023년. JW바이오사이언스 연구팀이 생각하는 췌장암 조기진단 키트 출시 예정 시점이다. 배수미 JW바이오사이언스 진단시약R&D팀장은 “CA 19-9를 통한 췌장암 진단은 말기 환자에만 높은 정확성을 나타낸다는 한계가 있지만, 이를 대체할 만한 기술이 마땅치 않아 현재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는 형편”이라며 “CFB와 CA 19-9를 함께 활용한다면 획기적으로 초기 진단율을 높일 수 있어 췌장암 환자의 기대 수명을 연장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배 팀장은 “키트가 완성되면 간단한 혈액검사만으로 췌장암을 찾아낼 수 있는 만큼 건강검진 항목에도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재까지는 전망도 밝다. 현재까지 진행된 임상 결과에 따르면 췌장암 진단율은 90% 이상으로 나타났고, 다른 암과 췌장암을 구분해 내는 ‘특이도’는 98%에 달한다. 현존하는 각종 악성 암 진단기술 중 가장 높은 진단 효율성을 기록 중이다. JW바이오사이언스와 연세대 연구팀은 앞으로 500명 이상의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대규모 임상시험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췌장암 조기진단 키트는 시장 전망도 밝은 편이다. 시장조사업체인 모도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글로벌 췌장암 치료 및 진단 관련 시장은 2015년 17억3000만 달러(약 2조원)에서 내년에는 2020년 31억8700만 달러(약 3조8000억원) 대로 커질 전망이다.
빛 쪼여 암세포 죽이는 기술도 개발 중
췌장암 조기 진단과 치료를 위한 연구는 해외에서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스웨덴 이뮤노비아(Immunovia) 연구팀은 29종의 바이오마커(질병 징후를 보여주는 지표)를 동시에 측정해 췌장암 진단 정확도를 높이는 제품을 개발 중이다. 미국의 반 안델 연구소(Van Andel Research Institute) 역시 기존 진단법(CA19-9)의 성능을 뛰어넘는 새로운 췌장암 진단 바이오마커로 'sTRA (sialylated tumor-related antigen)'란 제품을 연구 중이다. 하지만 아직 상용화에 이른 제품은 없다.
국내에서도 영인 프런티어가 혈액 검사를 통해 췌장암 진단의 정확성을 종전보다 10~30% 향상하고, 1ㆍ2기 췌장암도 조기 진단할 수 있는 키트를 개발 중이다.
진단뿐 아니라 췌장암 치료와 관련된 연구도 활발하다. GC녹십자셀은 내년 미국 임상 1상 진입을 목표로 항암 기능을 하는 T세포를 활용해 유도탄처럼 췌장암 세포를 공격하는 ‘CAR(키메라 항원 수용체)-T’ 치료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동성제약은 지난해 울산대학교와 서울아산병원으로부터 ‘치료용 레이저 프로브의 개발 및 의학적 활용에 관한 기술’을 이전받아 치료법 개발에 나섰다. 프로브(빛을 전달하는 광섬유)를 몸 안에 넣은 뒤 암세포 등이 빛에 반응하는 특성을 활용해 선택적으로 빛을 쪼여 암세포를 골라 죽이는 식이다.
이수기 기자 retalia@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