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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입성한 재즈 디바 “성공요? 20년은 걸리겠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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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4호 18면

[아티스트 라운지]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받은 가수 나윤선

나윤선은 10집 앨범 발매를 기념하는 60여차례 월드투어 공연을 마치고 귀국해 전국 투어를 시작한다. 사진은 지난 달 7일 프랑스 공연 모습. [사진 solar-x]

나윤선은 10집 앨범 발매를 기념하는 60여차례 월드투어 공연을 마치고 귀국해 전국 투어를 시작한다. 사진은 지난 달 7일 프랑스 공연 모습. [사진 solar-x]

‘사람의 목소리가 가장 아름다운 악기’라는 말이 있다. 그걸 가장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사람 중 하나가 재즈싱어 나윤선이다. 그는 듣도보도 못한 온갖 종류의 악기를 입으로, 아니 온몸으로 기어코 만들어내려는 장인 같다. 지난 3월 나온 10집 앨범 ‘이머전(Immersion)’도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실험한 50여 가지 소리를 담았다. 프랑스 발매 즉시 재즈 음반 차트 1위에 올랐고, 르몽드는 “나윤선의 목소리는 도저히 이 세상의 것이라고 믿기지 않는다”고 극찬했다.

10년 만에 두 번째 프랑스 훈장 #10집 앨범서 다양한 목소리 실험 #레이블 옮기고 미국서 활동 #리아 킴과 첫 뮤직비디오 촬영

그가 만들어낸 온갖 희한한 악기 소리를 12일부터 제주·서울·인천·천안 등 전국 곳곳에서 들을 수 있다. 1년 내내 세계를 돌며 공연하는 그는 늘 연말이 돼야 한국에 돌아온다.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왠지 집에 와야 될 것 같아서”란다.

미국 재즈 시장은 유럽보다 높은 벽

그는 프랑스가 사랑하는 재즈가수다. 지난달 28일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Officier)장’을 받았다. 한 등급 아래인 ‘슈발리에(Chevalier)장’을 받은 지 꼭 10년 만이다. “프랑스가 10년 동안 제게 관심을 가져줬다는 얘기잖아요. 그저 하던 일을 계속했을 뿐인데 정말 고맙죠. 프랑스가 대단한 나라란 걸 새삼 느꼈어요. 이걸 받은 전세계 사람들이 나가서 얼마나 프랑스 문화를 알리려고 노력하겠어요.”

지난해에는 프랑스의 한 시골 마을에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생겼다. “행사차 가보니 정말 ‘윤선 나’라고 길에 쓰여있더라”고 전한다. 충무로에 충무공이 출몰한 격이지만, 길에서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재즈 페스티벌이 유명한 동네라 길에 뮤지션 이름을 붙이자는 홍보 전략인거죠. 카메라 울렁증이 심해 TV에 거의 나가지 않으니 저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어요. 며칠 전 훈장수상 건으로 JTBC 뉴스룸에 나간 뒤 길에서 알아보는 사람을 처음 만났죠. 그날도 너무 힘들었어요. 카메라가 날 보고 있으면 긴장해서 목이 뻘개지거든요. 얼굴보다 목에 메이크업을 덕지덕지 바르고 나갔어요(웃음). 전 그냥 혼자 조용히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전부터 ‘혼자 조용히’ 입으로 낼 수 있는 소리를 시도해 왔지만, 10집 앨범에선 스펙트럼이 더 넓어졌다. 멀티 연주자이기도 한 프로듀서 클레망 듀콜과 어쿠스틱 악기들에서 생각지도 못한 낯선 소리를 끄집어내는 실험을 한 결과다. “(목소리가 두 겹으로 갈라지는 희한한 발성을 시연하며)저도 좀 배웠는데, 그린랜드에서는 한 사람이 화음을 내기도 하죠. 그런 식의 신기한 소리 실험을 악기로도 해보고 싶었어요. 프로듀서가 클래식 퍼커션을 공부한데다 팝음악에도 관심이 있고 현대무용까지 하는 친구라 무궁무진한 아이디어를 주더군요. 수록곡 ‘이즌 잇 어 피티(Isn’t it a Pity)’도 첼로 하나로 굉장히 많은 소리를 낸 것이에요.”

[사진 나승열]

[사진 나승열]

디지털 음향 때문에 재즈에서 팝쪽으로 음악적 변신을 시도했다는 평도 나온다. 하지만 그는 “내 음악의 형식과 내용은 같다”고 잘라 말한다. “같은 곡도 피아노로 연주할 부분을 목소리로 샘플링하는 식으로 사운드 실험을 했을 뿐이죠. 어쿠스틱 악기 사운드가 아니니까 팝처럼 들린다고 하네요. 소리가 좀 다르게 들리겠지만 저는 똑같은 사람이니까요. 갑자기 스타일을 바꾼 건 아니에요.”

최근 그는 오랫동안 함께 해온 독일 레이블을 떠나 워너뮤직으로 음반사를 옮기고, 활동 무대도 유럽 중심에서 미국으로 영역을 넓혔다. 좀 대중적으로 활동하려는 걸까 싶었지만, 전혀 아니란다. “유럽의 재즈뮤지션이 미국 메이저 음반사와 직접 계약하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그 정도 의미를 두는 거지, 그렇다고 더 많이 파는 건 아니예요. 미국에 진출해서 성공하려는 게 아니고, 새로운 시장에서 그쪽 뮤지션들과 자주 교류하고 싶은 거죠. 나이 오십에 종주국에 가서 배우는 느낌? 거기서 공연을 얼마나 하게 될 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본격적으로 경험해 본 미국 재즈시장은 유럽과는 달랐다. 미국인들은 재즈를 물과 공기처럼 생각할 뿐, 일부러 찾아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유럽에서 재즈를 더 많이 들어요. 미국은 재즈뮤지션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살아남기 어렵다고 하더군요. 지금껏 투어로 잠깐 거쳐 가다가 본격적으로 미국 활동을 하는 게 처음이라, 시간이 걸리겠죠. 유럽에서도 20년 걸렸는데, 미국에서도 20년 걸려도 좋다고 생각해요. 늘 하던 것을 시장을 좀 넓혀 계속하는 것이니까. 제가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하지만 미국 활동을 시작하면서 안 하던 마케팅까지 하게 된 게 가장 큰 변화란다. 워너뮤직의 권유로 SNS 계정도 만들고, 아이돌댄스 안무가인 리아 킴과 함께 처음으로 뮤직비디오도 찍었다. “저는 늘 혼자 해왔는데, 미국인들은 마케팅에 민감하더군요. 뮤직비디오도 어휴, 너무 힘들었어요. 리아 킴과 찍은 ‘할렐루야’에도 저는 딱 3장면만 나오죠. ‘할렐루야’는 무용하는 분이랑 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소개를 받았는데, 아이돌 안무가인 줄은 몰랐어요. 팝이나 유명곡들을 나름대로 춤으로 해석하는 게 너무 멋지더군요. 키가 자그마한데 몸을 어떻게 그렇게 쓰는지, 존경스러울 뿐이었죠.(웃음)”

“무대 위에 설 때가 가장 자유로운 순간”

1995년 프랑스로 떠난 이래 줄곧 세계를 떠돌아 온 그는 “움직여야 마음이 안정되는 체질”이란다. 2015년 해외투어를 일체 중단하고 1년간 한국에 머문 것도, 그런 자신을 재확인하는 계기였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면 톰 행크스가 계속 뛰다가 갑자기 딱 멈춰서 집으로 돌아가잖아요. 딱 그런 느낌? 잠깐 내 시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나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던 거예요. 쉬면서 혹시 내가 음악을 그만두려나? 내 인생을 확 바뀌는 계기가 될까? 이런 생각도 했지만, 결국 아니었어요. 길 위에 있는 시간이 결국 나에게 가장 맞다는 걸 확인한 기회였죠.”

그를 여러 차례 만났지만 늘 빈틈없이 반듯하다. 틈을 찾으려 엉뚱한 질문을 던져도 한바탕 웃고 금세 꼿꼿해진다. 이런 반전 없는 ‘완벽주의자’가 자유롭고 즉흥적인 재즈를 하다니, ‘언행 불일치’가 따로 없다. “저는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거든요. 중고등학교 때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그저 선생님 말 잘듣는 모범생이었죠. 선생님이 줄 긋고 넘어오지 말라면 절대 안 넘어가고, 선생님이 먹지 말라면 떡볶이도 안 사먹었어요.(웃음) 대학 때도 수업 끝나면 집에 왔고 일탈해본 적도 없죠. 그런 고지식한 사람이 이렇게 자유로운 음악을 하고 있네요. 근데 그래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생활이 일정한 만큼 무대 위에서는 자유로운 음악을 하는 거죠. 가장 자유로운 순간이 무대에 서는 순간이에요.”

가정도 있는데 아무 속박 없이 세계를 돌아다니는 삶도 궁금하다. 직업을 떠나 한 여자로서 어떤 삶일까. “어려서부터 혼자 있는 걸 좋아했고, 외로움도 안 타는 성격”이라고 답한다. 남편인 인재진 자라섬 재즈페스티벌 예술감독에 대해서도 “알고 결혼했을 거다. 이런 나를 진심으로 응원해준다”고 했다. “하고 싶은 대로, 가고 싶은 대로 언제든 어디든 가라, 너를 응원한다는 게 남편, 시부모님을 포함해 모든 가족의 생각이에요. 너무 감사하죠.”

‘결혼은 뭐하러 했냐’ 물으니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라서”란다. “늘 돌아다니다 보니 말이 통하는 친구가 없어요. 어릴 때 친구들도 너무 오래 못 만나 연락이 다 끊겼죠. 남편과는 첫 만남부터 대화가 잘 통했어요. 제가 하고 있는 일, 제게 생기는 모든 일을 다 이해하고 있더군요. 제가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좋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라 많은 격려를 해주는 거겠죠. 저를 챙겨주고 제가 못하는 일을 대신 해주고, 제가 아무 걱정도 안 하게 해주는 사람이 남편이에요. 제가 운이 좋은 거죠.”

돈도 성공도 필요 없고, 혼자 노래하면서 하고 싶은 대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삶. 그럴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은 바로 남편이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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