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한성 팽창, 한옥단지가 이끌었네

중앙선데이

입력 2019.12.07 00:02

업데이트 2019.12.07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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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4호 20면

경성의 주택지

경성의 주택지

경성의 주택지

이경아 지음

도서출판 집

양옥 문화주택보다 건설비 싸
1937년 돈암동 첫 한옥 신도시

삼청동은 한·양 절충식 유행
아련한 경성 주택 개발 풍경

‘경성의 이상적 주택지, 동부 발전의 중심지, 도로가 넓어서 각호에 자동차 출입 자유, 왕벚나무로 봄에는 만발 여름에는 깊은 녹음, 당사(當社)에 부동산 관리부가 있어 전임(轉任), 부재 등의 경우 토지건물소유자는 지극히 안심.’

얼핏 보면 요즘의 부동산 분양 공고인 듯싶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발간된 것으로 보이는 앵구 주택지(서울 신당동) 분양 안내 팸플릿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 당사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방계회사로 주택지 분양을 하는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다. 이 회사는 팸플릿을 제작하는 것은 물론 주택전람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주택의 도면과 사진을 포함한 도집을 발간해 새로운 주거문화를 적극적으로 소개한다. 87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광희문 밖 공동묘지와 화장장이 있던 신당동 일대는 경성의 대표적 빈민촌에서 전원주택지 문화촌으로 변모했다.

『경성의 주택지』는 앵구 주택지 등 일제 강점기 시대 서울에서 개발된 여러 주택지의 모습을 매우 상세하게 파헤친 역작이다. 이 책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살았던 북촌 가회동의 우종관 주택 2개 동(1928, 1931년 설계), 한양도성 밖 전원주택지로 개발된 신당동 앵구 주택지의 고 박정희 대통령이 살았던 가옥(등록문화재 제412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집으로 쓰였던 장충동 주택지의 동척중역사택 등의 숨어 있는 스토리도 소개한다.

100여 년 전 갑자기 시작된 주택지 조성 붐은 경성 인구 급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선시대 10만~20만 내외로 유지되던 경성 인구는 1920년대 39만, 1930년대 93만, 1940년대 100만에 육박할 정도로 급증했다. 이 때문에 주택난이 심각해졌다.

지금의 서울 신당동에 조성한 앵구 주택지를 홍보하는 1932년 분양 안내 팸플릿. 요즘 주택 분양 홍보지와 다를 게 없다. [사진 도서출판 집]

지금의 서울 신당동에 조성한 앵구 주택지를 홍보하는 1932년 분양 안내 팸플릿. 요즘 주택 분양 홍보지와 다를 게 없다. [사진 도서출판 집]

종로 이북을 일컫는 북촌은 조선시대 권문세가가 많이 살았던 지역으로 1930년대 대규모 필지 분할과 함께 당시로는 신식으로 도심 한옥단지가 개발됐다. 서울 시내 1만1700여 한옥 중 1200여 채가 북촌, 그중 290여 채가 가회동에 밀집돼 있다. 건양사를 설립한 정세권은 가회동·익선동·인사동·재동·계동·창신동 일대에 문화주택과 같은 외래 주택의 건설비용보다 저렴한 한옥을 대량 보급했다. 다양한 규모와 형태의 한옥들이 공존하고 있는 이곳은 마치 ‘20세기 한옥박물관’과 같은 느낌을 준다.

한옥마을로 이름난 북촌엔 문화주택이라 불리는 서양식 주택도 많이 들어섰다. 당시 조선인 상류층의 문화주택에 대한 동경과 욕망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가회동 우종관 주택은 화신백화점 주인 박흥식의 소유로 바뀌었다가 정주영 회장이 거주하기도 했다.

한양 도성에서 가장 풍경이 좋은 곳으로 유명한 삼청동에는 유학파 건축가 김종량 등이 참가해 한·일 절충 또는 한·양 절충식 주택이 구현됐다. 한촌이었던 후암동 일대는 공기가 상당히 좋고 이상적 건강지로 홍보돼 일본인들의 고급 주택지로 개발됐다. 후암동 학강 주택지는 충정로 금화장 주택지, 장충동 장충 주택지와 함께 경성 3대 문화주택지로 손꼽혔다. 국가 제사시설로 조성된 장충단이 1919년 공원으로 바뀐 장충동에는 백화원·소화원·장충 주택지가 들어섰다. 이곳은 북촌 일대와 같이 해방 이후 강남 개발이 본격화하기 전까지 고급주택지의 대명사로 불렸다. 약현성당, 정동교회, 배재학당 등 최초의 수식어가 붙는 서양식 건물이 많았던 신 주거문화의 전시장인 충정로 금화장 일대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철근콘크리트조 아파트도 들어섰다.

한양도성의 변방이었던 동숭동과 혜화동 일대는 경성의 학교촌과 조선인의 문화촌이 들어섰다. 공업전습소에서 바뀐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 경성제국대학의 법문학부와 의학부가 들어섰다. 대학 총장과 교수, 직원들을 위한 관사도 지어졌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던 이 지역은 많은 학교가 설립되면서 토지 가격이 급등했다.

경성의 첫 토지구획정리지구(1937년 지정)인 돈암지구는 한양도성 밖 첫 한옥 신도시였다. 한옥단지 하면 보통 가회동이나 인사동, 익선동을 떠올리지만 동소문동·동선동·삼선동·안암동·보문동 일대가 과거 거대한 한옥 신도시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일제 강점기에 개발된 주택지의 건물 대부분은 현재 재개발을 앞두고 있어 조만간 사라질지도 모를 위험에 처해 있다. 저자의 바람대로 이 책이 시간의 켜와 장소의 가치가 재발견되는 계기가 되면 좋으련만.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땅의 역사를 캐내는 작업은 한층 더 깊어져야 할 것이다.

한경환 기자 han.ky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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