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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이 돌아섰다, 이제 해방이다" 상드가 털어놓은 속마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53)

기독교의 성녀 중 한 사람인 마리아 막달레나 모습의 조르주 상드. 상드는 가족 그리고 쇼팽과의 관계에 있어 자신의 모습을 숭고한 사명을 다한 성녀로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루이 불랑제르의 드로잉. 뉴욕 공공 도서관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기독교의 성녀 중 한 사람인 마리아 막달레나 모습의 조르주 상드. 상드는 가족 그리고 쇼팽과의 관계에 있어 자신의 모습을 숭고한 사명을 다한 성녀로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루이 불랑제르의 드로잉. 뉴욕 공공 도서관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이번 편을, 본 시리즈 51편, 52편과 동시에 읽기를 권장합니다.

가족을 위해 희생적으로 헌신한 자신을 짚신 짝처럼 버린 딸은 배은망덕했다. 헌신적이고 자애로웠던 엄마에게 뻔뻔스럽게 돌아선 솔랑주가 극악무도하고 파렴치하게만 보였다. 상드는 자신의 원통함을 풀어줄 친구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솔랑주를 도와주라는 쇼팽의 편지가 왔다. 아직도 분은 풀리지 않았는데 쇼팽은 자신의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솔랑주를 감싸고 도는 것 같았다. 더구나 노앙의 저택을 떠난 후 솔랑주 부부가 인근의 여관에 있으면서 동네사람들에게 퍼뜨리는 집안의 여러 가지 낯 뜨거운 이야기에 대해서도 몹시 신경 쓰고 있던 때였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자기편이 되어야 할 쇼팽이 배신했다. 상드는 당장 펜을 들었다. 그동안 쌓였던 쇼팽에 대한 감정이 폭발했다. 쇼팽이 없애버렸는지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이 살벌한 편지에서 상드는 폭풍 같은 비난과 폭언을 쇼팽에게 쏟아낸 듯하다. 상드는 자신이 더 이상 딸을 보지 않을 것이며, 만약 딸 부부를 쇼팽이 받아들일 것이라면 노앙에도 돌아오지 말라고 끝을 맺었다.

파리에서 막 노앙으로 내려가려고 준비를 끝낸 상태에서 쇼팽은 이 편지를 받았다. 그는 충격 속에 상처를 받았고 심난했다. 자신에게 쏟아진 포탄도 포탄이었지만, 솔랑주를 내버리라고 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들라크루아에게 편지를 읽어주었다. 그도 잔혹한 편지에 놀랐다. 편지의 배경에 대해 명확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쇼팽이 그것을 소화하는데 며칠이 걸렸다.

이윽고 쇼팽은 무거운 마음으로 답장을 썼다. 이번 소동은 솔랑주의 결혼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사위를 선택함에 있어서 자신의 충고가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 충고를 흘려 들은 상드의 신중하지 못하고 성급한 태도와 행동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그 동안 의붓아버지로서의 노릇을 확인하면서 자신이 솔랑주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곳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내비쳤다. 첫 아기를 가진 딸에 대한, 엄마의 숙명적 역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프레데릭 쇼팽. 1847. 앙리 리망. [사진 Wikimedia Commons]

프레데릭 쇼팽. 1847. 앙리 리망. [사진 Wikimedia Commons]

쇼팽의 편지는 “난 기다릴 겁니다. 항상 똑 같은 마음으로. 당신에게 헌신적인 쇼팽”으로 끝났다. 상드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 편지였다. 그러나 이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상드의 마음은 이미 굳어진 듯했다. 벌써부터 온갖 곳에 솔랑주에 대한 비난을 퍼붓고 있었고 솔랑주가 쇼팽과 합작해 배신 음모라도 꾸민 것처럼 말을 퍼트렸다.

쇼팽의 답장이 도착하기 전에 쓴 친구 엠마누엘 아라고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솔랑주의 모략으로 쇼팽이 돌아섰다. 차라리 잘 됐다. 이제 짐스러운 관계를 끊을 수 있게 되었다. 9년동안 그의 편협하고 독단적인 사고방식이 나를 힘들게 했다. 나를 옭아 맨 사슬에서 해방될 수 있어 홀가분하다”라고 쓰고 있었다.

쇼팽의 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아라고에게 편지를 보낸 이틀 후 마침내 쇼팽에게 결별 통고를 했다. 상드는 딸을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은 솔랑주의 중상모략을 듣고 있었고, 그것을 믿을 것이다. 내가 나를 방어하는 것보다, 내가 낳고 젖을 먹여 키운 원수에게 당신이 넘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 더 낫겠다. 그렇게 원한다면 당신이 솔랑주를 잘 돌보라.” 그리고는 “잘 가요, 친구여”하고 결론지었다. 이 편지는 쇼팽의 편지와 엇갈렸다. 이것으로 쇼팽과 상드의 관계는 끝이 났다.

얼마 전까지도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편지는 겉으로 보기에 애정의 변화가 없는 듯했다. 여느 때처럼 쇼팽은 노앙에서 여름을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쇼팽의 제자 구트만은 이렇게 말했다. “결별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다만 상드는, 쇼팽을 파리에 두고 노앙에 있었고, 더 이상 그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래서 관계가 끊어졌다.”

노앙의 소동으로 상드는 생애에서 ‘가장 가혹하고 쓰라리고 처참한 시련’을 맞아 고통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상드 자신이었다. 클레징제의 본 모습은 쇼팽이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주저하는 딸을 클레징제에게 이끈 사람이 상드 자신이었다.

쇼팽과의 결별에 납득할 만한 이유가 필요했다. 쇼팽은 약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고, 반대로 상드는 강하고 파격적인 사람이었다. 상드는 병약해서 도움이 필요한 쇼팽과의 난데없는 결별에 대해 사람들의 비난이 자기에게 쏠리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쇼팽과 들라크루아. 조르주 상드의 스케치. 1840. 개인소장.

쇼팽과 들라크루아. 조르주 상드의 스케치. 1840. 개인소장.

상드는 쇼팽이 사랑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솔랑주였다고 비난했다. 내숭을 떠는 솔랑주가 쇼팽을 유혹하고 꾀어 그녀에게 빠지게 만들었다고 말을 퍼뜨렸다. 상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상드의 그것을 쇼팽과 결별의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상드가 많은 편지를 남겼다는 것을 여기서 강조한다. 딸 솔랑주를 비난하는 상드의 남아있는 편지는 수백 통, 아니 천 통을 넘을 수도 있다. 역사는 기록을 남긴 자에게 유리한 법이다.

쇼팽과 상드, 두 사람과 가까웠던 폴린은 “쇼팽이 솔랑주와 한 패가 되어 당신을 공격했다는 것은 완전한 거짓이다. 그는 여전히 당신에게 헌신적”이라며 쇼팽을 옹호했다. 폴린의 남편 루이도 “(솔랑주의 결혼 건은) 딸과 엄마 모두 속았고 실수를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모두 잘못이 있는데 왜 한 쪽만 책임을 져야 하냐” 며 상드를 꾸짖었다.

상드는 반박했다. “설사 나에게 죄가 있다 하더라도, 쇼팽은 그것을 믿지도 보지도 않아야 했다. 그 정도의 깊은 사이라면 존경과 은혜로써 서로의 허물은 들쳐내지 않는 거다.” 폴린은 둘 사이를 회복시키려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상드는 쇼팽의 주위 친구들과도 멀어졌다.

들라크루아도 상드의 편을 들 수 없었다. 솔랑주의 결혼 전말은 누구보다 그가 잘 알고 있었다. 상드가 예전처럼 노앙으로 와서 힘든 자신을 위로해 달라고 했지만 그 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그는 노앙을 찾지 않았다. 대신 쇠약해져서 천천히 무너져가던 말년의 쇼팽에게는 거의 매일 찾아갔다. 마를리아니 부인도 혼자가 된 쇼팽을 걱정하며 챙겼다. 쇼팽, 상드와 한 가족처럼 지내던 마리 로지에르도 쇼팽에게 동정적이었다.

가까이서 그들을 보아온 사람들은 상드가 쇼팽에게로 향하는 열정을 점차 잃었고, 쇼팽이 스스로 떠나지 않자 적당한 계기에 그를 밀어냈다고 생각했다. 전부터 상드는 쇼팽의 근거 없는 질투와 속 좁은 행동에 대해 비난해 왔다. 쇼팽의 질투가 진정 근거 없는 것인지는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솔랑주의 결혼을 앞둔 즈음에 상드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의 내용이 들어있다. 그것은 43살 여성의 열정에 관한 것이었다. “7년 동안 쇼팽, 혹은 다른 사람들과 처녀처럼 살아왔다”(그셰마와) “연정의 충동과 본능에 저항하며 살아왔다”(들라크루아) “아직 젊고 정열이 뜨거울 나이에 열정과 욕구를 잠재우고 절제하는 생활에 묻혀 지냈다. 의사들이 도가 지나친 금욕주의로 내 자신을 죽이고 있다고 말했다”(엠마누엘 아라고)

사실 쇼팽과 상드 두 사람의 부부관계는 일반적으로 마요르카 여행 중에 끝났을 것으로 본다. 병약한 쇼팽의 상태를 생각할 때 두 사람은 오랫동안 소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오랜 기간 동안 상드가 수도승 같은 생활을 했을 것으로 믿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상드가 편지에 쓴 주장은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 앞서도 예가 있었듯이 상드가 금욕 운운할 때는 뭔가 수상한 짓을 하고 있을 때다.

상드는 당시에도 자신이 창간에 관여한 지역 신문의 공동 편집자 빅토르 보리와 수상한 관계에 빠져있었다. 보리는 노앙의 집에 살다시피 했었다. 노앙에서 쫓겨난 솔랑주 부부가 인근 여관에 머물 때 상드가 특별히 신경 쓴 것은 자신과 보리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 말을 퍼뜨리는 것이었다. 상드는 솔랑주의 입을 통해 그것이 쇼팽에게도 흘러갔을 것으로 본 듯하다. 이렇듯 쇼팽의 존재는 상드의 자유로운 삶에 불편만 줄 뿐이었다.

조르주 상드의 첫 유언장. 1847년 7월 17일. 딸 부부와 노앙 자택에서 다툼이 있고 난 후 상드는 아들을 위한 유언장을 작성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조르주 상드의 첫 유언장. 1847년 7월 17일. 딸 부부와 노앙 자택에서 다툼이 있고 난 후 상드는 아들을 위한 유언장을 작성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그셰마와는 쇼팽이 흉금을 터놓는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에게 오랫동안 절제된 생활을 해 왔었다고 쓴 것은, 직접 말할 수는 없었지만 쇼팽에게 전하고 싶었던 얘기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에게 쇼팽이 줄 수 없었던 것을 분명히 하고, 그것에 기인한 자신의 부적절한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이었다.

커가는 모리스와 쇼팽의 갈등을 보면서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을 찾고 있던 상드였다. 솔랑주의 결혼과 일련의 빗나간 결과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희석시킬 필요도 있었다. 크게 보았을 때 클레징제가 상드의 잠자는 열정을 자극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고, 그 열정의 표출은 그녀의 결단을 앞당기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쇼팽과 헤어진 후 상드와 보리의 관계는 좀더 공공연한 것이 되었다.

막장 드라마의 에필로그. 수양딸 오귀스틴은 빅토르 보리가 소개한 한 화가와 결혼해 신랑을 따라 프랑스 남중부의 시골로 갔다. 두둑한 지참금을 챙겨갔고, 그 후로 다시는 상드를 찾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상드없는 쇼팽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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