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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2019년, 무거운 혐한의 공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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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윤설영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몇 달 전 일이다. 휴일 낮, 딸과 함께 도쿄 시내를 걷고 있었다. 백화점 앞 작은 광장에서 마이크를 든 남자가 서 있었다. 주변엔 욱일기가 날리고 있었고, 검은색 선전차량도 있었다. 한눈에 우익단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 국제법을 쓰레기로 아는 나라가 바로 옆 나라입니다. 한국인은 약속 따위 지키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한가로운 휴일 낮, 이런 혐오적 발언을 들어야 하다니. 혹시라도 딸아이가 알아들을까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일본에서 우익들의 웅변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안다. 소름 끼치게 불쾌한 기분을. 이날은 근처 공원에서 한일축제한마당이 있었다. 모처럼 “한·일은 함께 해야 하는 이웃”이라고 손잡은 날,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글로벌 아이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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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30일 대법원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하루에 한 번은 듣는 말이다. 논리가 간단해서 “협정문 해석의 차이”로 반박하다 보면 설명이 길어진다. TV 뉴스는 물론 신문, 잡지, 라디오, 인터넷 할 것 없이 일본 정부의 주장만 나온다. 일본 시청자들은 당연히 그게 ‘진리’인 줄 안다. 한국이 이상한 나라인 게 당연하다. 여론조사에서 “양보해야 한다면 한·일관계 개선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답한 게 69%나 되는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1년 넘게 계속된 한국에 대한 ‘라벨링(labeling)’ 작업의 결과다. 일본 사회 전반에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공기가 흐르고 있다. 누가 뭐라 약속을 한 건 아니지만,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혐한(嫌韓)의 공기가 일본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일본인 친구는 “정치적 주장일 뿐인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아니냐”라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정치적 주장과 한국에 대한 혐오가 교묘하게 섞여 무거운 공기처럼 떠돌아다닌다. 제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위축되기 마련이다.

식당이나 상점에서 불친절한 대응을 받으면 “내가 한국인이라 그런가” 의심하게 된다. 어린이집 학예발표회 때 내 딸이 가장 뒷줄 맨 끝에 서는 건 “키가 제일 커서가 아니라 한국인이어서 그런 건가” 싶다. 전철에서 스마트폰을 쓸 땐 초록색 검색창은 열지 않은지 오래다. 실제로 어떤 남자가 “오호, 조선어를 읽는구나”라며 시비조로 다가온 적도 있었다.

해가 바뀐다고 한·일관계가 좋아질까. 강제징용 해법이 나온다고 해서, 예전 같은 관계가 될 수 있을까.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지만, 다시 세우는 건 곱절의 시간이 필요하다.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을 것 같다. 겨울이 길다.

윤설영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