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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루묵이 풍년이래요” 펄떡이는 겨울 바다를 맛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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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일일오끼 - 동해

묵호항에서는 매일 아침 활어, 선어 경매장이 선다. 오전 9시 선어 경매가 시작되자 싸늘했던 부둣가에 비로소 활기가 돈다. 알이 그득 밴 도루묵, 기름기 좔좔 도는 가자미, 못생긴 곰치가 경매장 바닥에 누워 팔려나가길 기다리고 있다.

묵호항에서는 매일 아침 활어, 선어 경매장이 선다. 오전 9시 선어 경매가 시작되자 싸늘했던 부둣가에 비로소 활기가 돈다. 알이 그득 밴 도루묵, 기름기 좔좔 도는 가자미, 못생긴 곰치가 경매장 바닥에 누워 팔려나가길 기다리고 있다.

눈발 날리는 겨울이면 문득 바다가 궁금해진다.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바다 바라보고 철썩이는 파도 소리 들으며 올해도 수고한 자신을 토닥이고 싶어진다. 바다 내음 물씬한 밥상을 자신에게 선물해도 좋겠다. 소박한 생선탕이든, 거한 회 차림이든 상관없다. 동해로, 동쪽의 아무 바다가 아니라 강원도 동해시의 바다로 겨울 여행을 떠났다. 동해의 낡은 포구에는 도루묵이며 곰치며 온갖 기름진 것이 올라와 있었다.

알배기 도루묵 지금 맛 절정 #시원한 곰치국, 진득한 고깃국 #지역 식재료 활용한 빵 반찬도

묵직하고 칼칼한 국수의 힘

동해는 역사가 짧다. 사람 나이로 딱 불혹이다. 1980년 강릉시 묵호읍과 삼척시 북평읍이 합쳐져 동해시가 태어났다. 묵호항이 한국 3대 어항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젊은 도시인 데다 외지인이 섞여든 까닭일까. 동해는 다른 문화를 덜 배척한다. 음식도 그렇다. 동해에서만 먹을 수 있는 별미, 대를 이어온 노포가 많은 건 아니다. 대신 어딜 가나 펄떡이는 바다가 느껴지는 한 상, 푸근한 사람 냄새나는 한 끼니를 만날 수 있다.

오뚜기칼국수에서 먹은 장칼만둣국.

오뚜기칼국수에서 먹은 장칼만둣국.

지난달 27일 묵호항에 도착해 가장 먼저 장칼국수를 먹었다. 강릉·양양·평창에서도 많이 먹는 음식으로 동해에도 내로라하는 국숫집이 몇 곳 있다. 입맛에 따라 선호가 갈리는데, 이번엔 골목 안쪽 ‘오뚝이칼국수’를 찾았다. 장칼국수 5000원, 장칼만둣국 6000원. 백발 어르신이 만두 빚는 모습을 보고는 장칼만둣국을 주문했다. 신김치 맛이 도드라진 만두, 묵직한 면발, 죽처럼 진한 국물이 놀라운 앙상블을 이뤘다. 가게마다 국물 내는 방식이 다른데 이 집은 멸칫국물에 고추장만 푼다고 한다.

양이 워낙 푸짐해 공깃밥은 엄두가 안 났다. 이 가격에 이만큼의 포만감을 안겨주는 음식도 드물 터이다. 손님이 문 열고 나갈 때마다 김계화(71) 사장은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라는 말을 빠뜨리는 법이 없었다. 소박한 음식과 인사 한마디가 건네준 힘은 꽤 셌다.

제철 맞은 도루묵

논골담길 벽화. 가난했던 시절 묵호항과 논골의 풍경이 담겨 있다.

논골담길 벽화. 가난했던 시절 묵호항과 논골의 풍경이 담겨 있다.

묵호항에 왔다면 ‘논골담길’을 걸어야 한다. 묵호항 옆 갯마을이 논골이고, 논골의 묵호등대 오르는 길이 논골담길이다. 20~30년 전만 해도 아낙들이 항구에서 이고 온 명태와 오징어를 빨래처럼 말리는 풍경이 흔했다. 마을 담벼락에 그 시절을 그린 벽화가 가득하다. 곽재구 시인은  신포구기행에서 이렇게 썼다.

“동피랑(통영)과 총포(여수)의 벽화는 쇠락한 마을을 예쁘게 보이기 위한 장식용 벽화인 데 비해 이 마을의 벽화는 현실적이며 설득력이 있다. 삶은 무엇인지 물어오는 느낌, 힘든 시절 자화상을 보는 느낌이 있는 것이다.”

논골담길을 걸은 뒤 묵호항 활선어센터를 찾았다. 묵호항을 먹여 살렸던 명태는 아예 씨가 말랐고, 오징어는 ‘금(金)징어’가 된 지 오래다. 대신 배가 터지도록 알을 밴 도루묵이 주인공 행세를 하고 있었다. 못생긴 곰치와 기름기 좔좔 도는 대구도 많았다. 활어 코너에서는 대방어가 펄떡였다. ‘충남수산’ 조진숙 사장은 “며칠만 더 있어도 도루묵 알이 질겨진다”며 “지금 먹어야 가장 부드럽고 고소하다”고 강조했다.

요즘 동해에선 쥐치가 많이 잡힌다. 회로 먹으면 별미다.

요즘 동해에선 쥐치가 많이 잡힌다. 회로 먹으면 별미다.

도루묵찌개. 알배기 도루묵은 지금 가장 맛있다.

도루묵찌개. 알배기 도루묵은 지금 가장 맛있다.

팔뚝만 한 오징어와 요즘 잔뜩 맛이 올랐다는 쥐치를 회 떠 인근 식당으로 갔다. 항구 주변의 모든 식당이 겨울 메뉴로 내놓은 도루묵찌개를 주문했다. 쫀득쫀득한 오징어, 씹을수록 단맛이 오르는 쥐치, 알이 터질 때마다 고소한 향이 입안에 번지는 도루묵을 번갈아 먹는 재미가 남달랐다. 이 계절에만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동해 뱃사람의 소울푸드 곰치국

동해는 곰치의 고장이다. 사철 잡히지만 겨울에 뜨끈한 곰치국을 찾는 사람이 많아 고깃값이 비싸진다.

동해는 곰치의 고장이다. 사철 잡히지만 겨울에 뜨끈한 곰치국을 찾는 사람이 많아 고깃값이 비싸진다.

사는 게 퍽퍽하다고 느껴지면 어시장 경매장을 찾는다. 방금까지 바다를 헤집던 물고기,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뱃사람, 불가해한 암호를 외치는 경매사, 악착같이 좋은 물건을 찾는 상인들이 엉켜 있는 장면은 가장 활기 넘치는 삶의 현장 중 하나일 것이리라.

28일 아침 묵호항 경매장에는 온갖 물고기가 박스에 담겨 누워 있었다. 죽은 생선을 파는 선어 경매였으나 살아서 꿈틀대는 곰치도 많았다. 정확한 이름은 ‘꼼치’ 또는 ‘미거지’이나 동해에서는 그냥 곰치라 한다. 시커먼 수놈은 생긴 게 영 비호감인데, 맛이 암놈보다 좋단다. 오재용(50) 경매사의 설명을 옮긴다.

김치를 넣고 끓인 곰치국. 이만한 해장국이 없다.

김치를 넣고 끓인 곰치국. 이만한 해장국이 없다.

“곰치 배는 강릉·속초보다 동해가 훨씬 많습니다. 곰치는 1년 내내 잡히는데 날이 추울 때 곰치국을 많이 찾으니 겨울에 가격이 오르죠. 12월부터 대게잡이를 시작하면 어획량이 줄어 곰치 값이 더 뜁니다.”

경매를 구경하고 어달해변 가는 길목의 ‘일출 곰치국’에서 곰치국(1만5000원)을 먹었다. 묵은지를 넣고 푹 끓인 벌건 곰치국이 나왔다. 전형적인 강원도 갯마을 곰치국이다. 김치가 들어갔는데도 국물이 텁텁하지 않았다. 숟갈로 떠먹는 생선 살은 목젖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넘어갔다. 이 맛에 뱃사람이 진탕 취한 다음 날 곰치국을 찾았을 터이다. 황순애(59) 사장은 “김치를 담글 때 젓갈은 안 쓰고 소금으로만 간한다”며 “곰치국은 김치와 함께 끓여야 속이 확 풀린다”고 말했다.

전국 3대 오일장과 소머리국밥

북평장에서 먹은 소머리국밥.

북평장에서 먹은 소머리국밥.

묵호항에서 남쪽 9㎞ 아래에 북평장이 있다. 조선 정조 20년(1796년) 기록에도 등장할 정도로 오래된 시장이다. 그때부터 오일장은 매달 3·8·13·18·23·28일, 꼭 여섯 번씩 열렸다. 

북평장은 전국 3대 오일장으로 꼽히는 큰 장이다. 그럴 수밖에. 동해안을 종단하는 7번 국도뿐 아니라 정선에서 넘어오는 42번 국도, 태백과 연결된 38번 국도가 북평장 바로 앞까지 나 있다. 동해시 이정숙 관광과 계장은 “한마디로 북평장엔 없는 게 없다”며 “지금도 많은 시민이 대형마트보다 북평장에서 장 보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다.

북평장에서는 주전부리 먹는 재미도 남다르다.

북평장에서는 주전부리 먹는 재미도 남다르다.

28일 오전, 궂은비가 내리는데도 많은 상인이 좌판을 펴느라 분주했다. 넓은 장터가 아니라 골목을 따라 자리를 잡았다. 언뜻 어수선해 보였지만, 수산물·농산물·생필품 등 품종에 따라 구획이 나뉘어 있었다. 메밀전병·찹쌀도넛 같은 주전부리 사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15년 전만 해도 우시장이 섰다. 장 한편에 남아 있는 여남은 개의 국밥집이 그 시절을 대변한다. 47년을 이어온 ‘대성집’에 들어갔다. 순댓국(7000원)도 팔지만, 이 집의 간판 메뉴는 소머리국밥(8000원)이다. 진득한 국물이 보약 같았다. 머리 고기와 우설이 곰치살처럼 부드러웠다. 유난히 달큰한 국물의 비결을 물었다. 정봉여(76) 사장은 “좋은 한우와 사골을 대여섯 시간 달이는 것 말고는 특별한 게 없다”며 웃었다.

밥반찬 말고 빵 반찬

메르시마마 스튜디오에서 맛본 빵 반찬.

메르시마마 스튜디오에서 맛본 빵 반찬.

묵호항 인근 후미진 골목에 프랑스의 작은 슈퍼마켓 같은 공간이 있다. 직접 만든 빵과 식재료를 파는 ‘메르시마마 스튜디오’다. 먼저 알아두자. 일주일에 단 3일, 목~토요일에만 문을 연다.

메르시마마 권혜경(60) 대표는 이력이 독특하다. 30년 동안 패션 일을 하다가 돌연 ‘빵 반찬’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단다. 한국에선 빵에 잼 발라 먹는 게 보통인데 빵의 본고장 프랑스처럼 다양한 반찬을 곁들이는 문화를 알리고 싶었다.

“2017년 고향인 동해에 정착했습니다. 약천마을 1만6000㎡ 밭에서 기른 유기농 밀·토마토·바질 등과 지역 식재료를 활용해 빵과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죠.”

반찬은 다채롭다. 구운 토마토, 바질페스토 같은 유럽식이 있는가 하면 아보카도 명란, 앙버터 같은 퓨전 메뉴도 있다. 빵 반찬 3종 세트(2만7000원)와 명란 바게트(5800원)가 가장 인기다. 예약하고 방문하면 바게트에 얹은 빵 반찬을 맛볼 수 있다. 따뜻한 차와 함께 제법 든든할 정도로 다양한 음식이 나온다. 시식은 무료이나, 자선단체에 보낼 기부금(1인 2000원)을 받는다.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확고한 권 대표도 결국 고향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건강한 음식을 만들려면 환경이 가장 중요한데 미세먼지 청정지역인 동해만 한 곳이 없더라고요.”

동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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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글·사진 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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