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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 견뎌야 꽃 피우는 화초가 있다, 사람도 그럴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49)

춘화 현상(春化現象)

화분 하나 보자는데도 건너야 할 게 있다
내 몸보다 꽃의 온도에 마음을 겨누라 한다

서늘하게 지켜보되 짐짓 외면하고
단디 한 걸음씩 떼라 한다

야윈 볕을 가둔 베란다
유리 사각 무대엔
꽃보다 이파리만 무성하고

누구와 만날 때
너이냐 나이냐 사이를 베는 칼날

두 절벽에 걸쳐 아지랑이 피어난다

해설

요즘은 거의 아파트 생활을 한다. 그래도 거실과 베란다가 구별되었을 땐 여러 종류 화분을 사다 놓고 사시사철 꽃을 키우는 집이 많았다. 거실을 넓게 사용하는 게 유행이 되고 나서부터는 집안에서 화초를 키우기가 더 어려워졌다. 이집 저집 다녀보면 화초를 좋아하고 잘 기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뚜렷하게 구분이 된다.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식물은 그에 알맞은 온도를 유지해주어야 봄에 아름다운 꽃이 핀다. 그런 현상을 춘화현상이라고 부른다. 대개 이른 봄에 개화하는 식물이 겨울종 식물이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 백합, 튤립, 춘란, 보리 등이다.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식물은 그에 알맞은 온도를 유지해주어야 봄에 아름다운 꽃이 핀다. 그런 현상을 '춘화 현상'이라고 부른다. [사진 pixabay]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식물은 그에 알맞은 온도를 유지해주어야 봄에 아름다운 꽃이 핀다. 그런 현상을 '춘화 현상'이라고 부른다. [사진 pixabay]

노년에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도 사시사철 화초를 잘 키웠던 어머니는 베란다를 늘 서늘하게 유지하셨다. 환기도 자주 하고 물주는 시기도 정확히 맞추셨다. 나는 분가하고 나서야 화초 키우는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 잎사귀 하나하나와 말을 걸어가며 닦아주시는 손길이 새삼 그리워진다.

『장자』의 ‘지락(至樂)’ 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교외에 날아들었다. 노나라 임금은 기뻐 친히 이 바닷새를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왔다. 술을 권하고, 제례악인 구소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제사음식인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 하고 슬퍼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를 부양하는 방법으로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기른 게 아니다.”

무릇 모든 생명체는 자신에게 알맞은 조건이 있다. 무엇인가를 진정 아끼고 사랑한다는 건 대상에 다가가 그 태생적 삶의 조건을 이해하고, 내가 아니라 그에 맞추어 주는 걸 말한다. 성인이 된다는 건 이런 경우를 다양하게 체험하고 실패한 후 오는 선물 같은 거다. 특히 가장 갈등이 심한 관계가 가족 관계다. 전혀 다른 환경과 성격을 살아왔던 남녀가 만나 결혼하고 자식을 낳으면서 가정을 이룰 때 자신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뼈저린 체험을 한다.

무엇인가를 진정 아끼고 사랑한다는 건 대상에 다가가 그 태생적 삶의 조건을 이해하고, 내가 아니라 그에 맞추어 주는 걸 말한다. [사진 pixabay]

무엇인가를 진정 아끼고 사랑한다는 건 대상에 다가가 그 태생적 삶의 조건을 이해하고, 내가 아니라 그에 맞추어 주는 걸 말한다. [사진 pixabay]

결혼 후 첫 부부싸움을 했을 때, 첫 아이를 낳고 품에 안았을 때 느꼈던 감정은 더는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자각이었다. 내가 바뀌어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겠다는 절실함이었다. 길을 건널 때도 좀 더 살피고 조심하게 되었다.

며칠 전에 ‘더, 오래’ 콘서트에서 우리 사회 원로이신 김형석 교수의 특강을 들었다. 1920년 생이니 올해로 100세다. 어쩜 그렇게 자세가 정정하고 논리가 정연하며 뜻이 크고 깊은지 놀랐다. 말씀으로 전하는 훌륭한 자서전을 들은 셈이다. 자서전은 한 개인의 서사시이다. 자서전 하면 어려서 어떤 집안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어떤 직업을 택했는지 어떻게 고생해서 돈을 벌고 실패와 성공을 했는지 떠올리게 된다. 보통 자기 이야기를 별다른 생각 없이 나열하는 수준에 머물고 만다.

그러나 진정한 자서전이 되려면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타자가 되어야 한다. 이러저러한 상황에서 어떤 타자를 만났는데 그로 인해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바뀌게 되었다는 내용을 고백해야 하는 게 자서전의 본질이다. ‘나는 나였다’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바뀌었다’가 되어야 인생의 말미에 쓰는 겸허하고 진정한 서사시가 되는 거다.

김 교수도 강의 내내 자신을 변화시켰던 사람들의 만남과 사연을 풀어냈다. 첫 가르침은 아버님이었다. 학교공부를 못 했던 분이지만,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첫 말씀이 자신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민족과 사회를 위한 공부를 하라고 충고했단다. 유학 시절엔 정년 없이 나이 들어서도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은사의 모습에서 과거 지향적이고 근본주의적 철학이 아니라 변화를 받아들이는 철학 정신을 배웠다고 한다. 어떤 나라가 발전하는지,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따끔하게 지적했다. 우리가 자신을 고집하고 과거 지향적이지나 않은지 반성하자고 말한다. 또 독서하는 민족이 되어야 한다고 거듭 부탁했다. 본디 책을 아끼고 독서하는 민족이었는데 요즘엔 일본인이 우리의 두 배, 미국인은 그의 두 배나 더 많이 읽는다고 한다.

더,오래 콘서트에서 김형석 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중앙포토]

더,오래 콘서트에서 김형석 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중앙포토]

처음 가정을 이루고 유지하려 일을 할 때 수입만 보고 달려들었지만, 그때는 늘 피곤하고 보람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보람을 찾아 일하게 되자 피곤도 사라지고 일도 사랑하게 되었단다. “80세까지 일해 보니 결국 일의 목적은 딱 하나더라. 내가 그 일을 하면서 얼마나 행복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 하는 거다.” 보람차고 행복하게 일했더니 오히려 수입이 더 늘더란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도움이 되었던 주인공 타자들은 김태길과 안병욱 박사였다. 자신보다 남과 사회를 먼저 생각하고, 흐트러짐 없이 살아온 그들 덕분에 지금까지 남아 그 꿋꿋한 정신을 이을 수 있었다고 겸손히 말한다. 80 후반이 넘고 셋이서 작은 모임이나 가지려 했으나 남에게 마음의 빚을 주는 게 싫다는 말에 마다했단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너그러운 외유내강의 삶을 살아낸 거다. 이런 분들 덕분에 우리 사회가 더 건강하게 유지되는 건 아닐까.

칼날을 누구에게 겨누어야 할지는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제대로 된 가늠에서 아련한 아지랑이는 피어날 거다.

한의원 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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