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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금융 권력 변천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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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돈과 권력은 불가분이다. 수준도 정비례한다. 후진국일수록 비선·실세가 힘을 쓴다. 황제급부터 내시급까지 다양하다. 유재수(전 부산시 부시장)는 어느 급일까. 그의 좌표를 역대 정권과 견줘봤다.

후진국일수록 비선·실세 힘이 세 #‘재인이 형’ 유재수의 인사 농단설 #사실이라면 금융후진국 자백한 꼴

박정희 정권=개발 독재형. 초기 실세는 유원식 대령이었다. 재벌을 잡아들이고 화폐 개혁을 주도했다. 박정희에게 “경제는 내게 맡기시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혼자 은밀히 틀어쥐고 단행한 1962년 6월의 화폐 개혁은 실패했다. 애초 인플레 조절용이 아닌 데다 미국의 협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개국 공신급. (이장규 『대통령 경제학』)

전두환·노태우 정권=군부 독재형. 이원조 전 은행감독원장의 독무대였다. ‘금융 황제’로 불린 최초의 인물이다. 두 전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으로 하나회와 5공 정권의 비자금, 노 전 대통령 대선자금에 간여했다. 입이 무겁고 분수를 알았다, 재무부 장관 자리를 “감당할 능력이 안 된다”며 거절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장관 시켜준대도 거절하는 자가 있다. 이원조다”라고 공개하면서 이원조의 힘은 더 세졌다.  은행장 인사를 좌지우지했고, 은행을 통해 기업도 마음대로 주물렀다. 명실상부 황제급.

김영삼 정부=적폐 청산형. 12년간 금융 권력을 독점했던 ‘이원조 라인’의 옷을 모조리 벗겼다. 대부분 은행장과 금융공기업, 금융협회장이 임기를 남긴 채 경질됐다. 결과는 신통찮았다. TK가 PK로 바뀌는 데 그쳤다. 반쪽짜리 금융 개혁의 결과는 정권 말 외환위기로 이어졌다.

김대중 정부=구조조정형. 금융 권력을 연합 집권세력인 자민련에 넘겼다.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이 전권을 휘둘렀다. 은행을 통해 재벌 개혁을 압박했다. ‘이헌재 사단’이 금융 실세로 등장하면서 집권 세력과 긴장이 높아지기도 했다. 이때 이후 금융 권력을 가져간 금감위원장, 금감원장들이 줄줄이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권력의 역설이었다. 전시 사령관급.

노무현 정부=시장 방임형. 상대적으로 금융에 별로 손대지 않았다. 구조조정을 끝내고 몸이 가벼워진 은행이 가장 돈을 많이 번 시기다. 2004년 씨티의 한미 은행 인수 등 시장의 인수·합병도 활발했다. 장수 은행장들이 등장했다.

이명박 정부=5대 천황형. 강만수 전 기재부 장관이 최고 실세였다. MB와 인연이 깊은 인물들이 5대 금융지주회장을 독식했다. 청와대가 금융회사 사외이사까지 챙겼다. 당시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금융위, 청와대, 해당 금융회사가 3분의 1씩 인사를 했다”고 했다. 전직 은행장 A 씨는 “한국 금융을 크게 후퇴시켰다”고 혹평했다.

박근혜 정부=행동대장형. 금융위 부위원장인 정찬우가 인사 통로였다. 청와대와 권력 실세의 주문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종종 민간 금융회사 인사에까지 완력을 휘둘렀다. 거친 일 처리로 잡음이 많았다. 골목대장급.

문재인 정부는 어디쯤일까. 유재수 전 부시장이 단초다. 그가 ‘재인이 형’ ‘호철이 형’을 입에 달고 살았다니 관계에 의한 권력이요, 황제급은 아니지만 공식 채널보다는 센 실세였던 것 같다. 그가 금융위 재직 시절 금융가에선 “금융위 서열 1위는 유재수 국장, 2위가 부위원장, 위원장은 서열 3위”란 말이 공공연히 돌았다. 금융위원장도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기자들이 물으면 “두 사람이(나보다) 청와대에 더 잘 통한다. (금융위 업무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유재수는 ‘감찰 무마 의혹’이 불거진 2017년 11월 금융위에서 물러났다. 세간의 이목이 쏠리면서 행보도 더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덕분에 인사와 돈, 큰 사고는 안 쳤을 것이다. 연말 금융가는 바야흐로 인사 시즌이다. 신한·기업·우리·농협 등이 줄줄이 회장·행장을 선임한다. 역대 금융 권력과 유재수 반면교사 효과로 자율 인사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가 시장 자율형이나 반면교사형으로 규정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권력에도 좋고 금융에도 좋을 것이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