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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 논설위원이 간다

펭수에게 성별을 물어보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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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성 중립성의 진화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하다는 펭수. 보통 직장인이라면 하기 힘든 ‘사이다 발언’으로 ‘직통령(직장인들의 대통령)’으로 불린다. EBS 캐릭터지만 ‘교육’하고는 거리가 멀다. 말이 궁해지면 뜬금없이 EBS 사장 “김명중”을 외치는 게 전매 특허다. 올해 나이 열 살의 펭수에게는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다. 남극유치원을 졸업한 뒤 뽀로로와 방탄소년단을 넘는 ‘우주대스타’가 되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EBS 연습생이 됐다.

여자같은 남자, 남자같은 여자 #문화 코드로 떠오른 성 중립성 #젠더리스 패션, 성 중립 육아도 #밀레니얼 세대의 주요 트랜드

인기 캐릭터 펭수. 성인 남성 목소리지만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사진 EBS]

인기 캐릭터 펭수. 성인 남성 목소리지만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사진 EBS]

여기서 문제. 펭수의 성별은? 인터넷에는 펭수의 정체로 여러 남성 성우의 이름이 거론되지만, 프로필에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고 돼 있다. 목소리는 분명 성인 남성이지만 ‘젠더 프리’ ‘젠더 뉴트럴(gender neutral·성 중립)’한 존재다. 펭수의 성별을 따져 묻는 것 자체가 ‘꼰대 감별법’이란 얘기도 있다. 전통적 성 역할에 반기를 드는 것을 넘어선 ‘성 중립성(gender neutrality)’ 트렌드다.

엠넷 ‘퀸덤’에서 AOA가 선보인 무대. 수트를 입은 걸그룹과 여성성을 강조한 여장남자댄서팀의 조합이 화제를 모았다. [사진 엠넷]

엠넷 ‘퀸덤’에서 AOA가 선보인 무대. 수트를 입은 걸그룹과 여성성을 강조한 여장남자댄서팀의 조합이 화제를 모았다. [사진 엠넷]

얼마 전 엠넷의 여자 아이돌 경연 ‘퀸덤’에서는 ‘섹시 뒷태 통신사 입간판’으로 유명한 설현 등으로 구성된 대표적 섹시 그룹 AOA의 일대 변신이 화제였다. 하이힐을 벗어 던지고 수트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여장남자 댄서들이 여성적 동선을 극대화하는 ‘보깅’ 댄스팀과 공연했다. 걸그룹 백댄서로 보깅 댄스팀이 나와 방송을 탄 것은 처음이다. 젊은 여성 관객의 호평이 이어지며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AOA는 새 앨범 ‘뉴 문’에서도 터프한 바지 차림을 선보였다. 걸그룹 브아걸은 아예 신곡 ‘원더걸스’ 뮤직비디오에 드랙퀸(여장남자) 댄서들을 집단으로 등장시켰다. 같은 시기 방송된 KBS 드라마 ‘조선로코 녹두전’은 여자보다 더 예쁜 여장남자(장동윤) 캐릭터로 젊은 층에 큰 인기를 모았다. 여성 팬들이 ‘여성적 남성’ ‘남성적 여성’에 열광하는 모양새다.

성 중립성 코드는 일찌감치 패션계도 접수했다. 지난 9~10월 세계 4대 패션위크(뉴욕·런던·밀라노·파리)의 공통 테마는 ‘젠더리스(genderless)’였다. 남성모델들은 치마를 입거나 핑크색 꽃무늬 디자인, 속이 비치는 시스루 소재, 여성복에 흔히 등장하는 바지 옆트임 장식을 선보였다. 반면 여성복은 거칠고 강렬했다. 단순히 남녀가 함께 입는다는 ‘유니 섹스’ 차원을 넘어 옷에서 성별, 성차를 지워버리는 것이 최근 성 중립성의 요체다.

KBS ‘조선로코 녹두전’의 '여장남자'로 주목받은 장동윤(왼쪽)과 김소현. [사진 KBS]

KBS ‘조선로코 녹두전’의 '여장남자'로 주목받은 장동윤(왼쪽)과 김소현. [사진 KBS]

국내 패션도 변화하고 있다. 요즘 옷 좀 입는다는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오버사이즈 재킷 등 아빠 옷을 입은 듯한 ‘아빠 핏(dad fit)’이 유행이다. 홍익대 간호섭 교수(패션디자이너)는 “이미 아동에서 대학생까지의 옷, 신발에서는 색상 디자인 등 남녀 구분이 사라졌다. 여자가 남자 재킷을 사고 남자가 여자 스웨터를 사 입는 경우도 많다”며 “전통적 성 역할의 붕괴로 젠더리스 패션은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국내 패션 홈쇼핑 업체도 남녀 옷을 따로 만들지 않고, 동일 디자인을 사이즈만 다양하게 만드는 단계”라며 “조만간 명품 매장의 남녀 구분 섹션도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실 서구에서는 패션뿐 아니라 언어, 교육, 라이프스타일 등 전방위에서 성 중립성 논의가 가파르다. 남성, 여성에 이은 제3의 성(트랜스젠더 등)을 배려한 성 중립 화장실의 등장, ‘체어맨(의장 chairman)’ 대신 ‘체어퍼슨(chairperson)’, ‘카운슬맨(시의원 councilmen)’ 대신 ‘카운슬 멤버스(council members)’를 쓰는 성 중립 언어의 사용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바비 인형으로 유명한 마텔은 성 중립 인형도 내놓았다. 6개 피부색 몸체에 성별에 상관없이 다양한 헤어 스타일, 의상을 취향대로 조립할 수 있다.

서구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남성인지 여성인지 불분명한 상황이거나 성별을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을 때 ‘he(그)’‘she(그녀)’ 대신 3인칭 단수로 ‘they’를 쓰는 경향도 늘고 있다. 스웨덴에는 ‘han(그)’ ‘hon(그녀)’ 대신 성 중립 인칭 대명사 ‘hen’을 쓰는 성 중립 유치원이 여럿이다.

올 아카데미 시상식에 드레스 차림으로 등장한 남자 배우 빌리 포터. [AP=연합뉴스]

올 아카데미 시상식에 드레스 차림으로 등장한 남자 배우 빌리 포터. [AP=연합뉴스]

최근 영국 더 타임스는 성 고정관념을 탈피하기 위해 실험적인 성 중립 양육을 택한 30대 부부의 사연을 소개했다. 이들 부부는 아이의 성별을 비밀에 부치고 남아용 여아용 의상을 번갈아 입히고 있다. 아이가 자라면 스스로 성별을 선택하도록 할 예정이다. 부부는 “성별과 관계없이 아이가 본인만의 온전한 인격체로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미국 노스웨스턴대 알렉산드라 솔로몬 교수는 이에 대해 “성 중립 양육은 자녀에게 더 많은 기회와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KBS 가족예능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한 배우 봉태규의 아들 시하가 비슷한 경우다. 귀여운 외모의 시하는 방송 초기 성별을 알 수 없는 단발머리에 핑크색도 좋아하고 치마나 원피스도 즐겨 입었다. 같은 어린이 출연자들이 시하의 성별을 놓고 갑론을박했다. 당시 일부 시청자가 시하의 여자 옷차림을 문제 삼자 봉태규는 자신의 SNS에 “시하는 핑크색을 좋아하고 공주가 되고 싶어하기도 한다. 응원하고 지지해주려 한다. 중요한 건 사회가 만들어놓은 기준이 아니라 시하의 행복”이라는 글을 올렸다. “저도 핑크색을 좋아하지만 애가 둘이다”라는 글도 덧붙였다.

전통적 성 역할에 갇히지 않는 성 중립성은 밀레니얼·Z세대를 중심으로 퍼지는 ‘성 유동성(젠더 플루이드·gender fluid)’ 개념과도 관련 있다. 성 역할이 고정된 것이 아니듯 개인의 성 정체성도 가변적이고 선택 가능한 것으로 보는 개념이다.  2018년 구찌 등이 관여해 펴낸 Z세대( 90년대 중반~2000년대 중반 출생) 보고서 ‘이레귤러 리포트 2’에 따르면 ‘규정되지 않는 유동성’을 핵심으로 하는 Z세대는 젠더에 대한 태도 역시 유동적이다.

미국 Z세대(15~24세) 201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25%가량이 정치 성향이 바뀌듯 “젠더 정체성이 평생 변화할 것으로 예상한다”는 응답을 내놓았다. 이성애자였다가 동성애자가 된 미드 ‘섹스 앤드 더 시티’의 배우 신시아 닉슨처럼 실제 사례도 나오고 있다. 미국 ‘헬스 닷컴’은 최근 북미 갱년기학회 연례회의에서 발표된 논문을 인용해 “나이 들면서 성 정체성이 바뀌는 성 유동성이 존재한다”고 전했다. 아직은 낯선 개념이지만, 그만큼 고정된 성적 이분법이 흔들리고 있다는 얘기다.

『젠더 정체성은 변화하는가』의 저자인 영국 리즈대 샐리 하인즈 교수는 “젠더 유동성이라는 것은 젠더가 생물학으로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사회·문화·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라면서 “전형적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보이던 특성도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변했다. 한 나라에서 남자나 여자에게 일상적인 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고 썼다. 그는 또 “전통적 젠더 역할은 초기 농경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충족하기 위해 생긴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물론 일각에서는 과격한 성 중립 육아가 아동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준다며 반발하는 의견도 있다. 당장 바티칸이 성 유동성 개념으로 인한 혼돈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성 역할의 고정 관념 깨기, ‘젠더는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인식이 가져오는 사회적 변화를 되돌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7세 딸, 3세 아들을 키우고 있는 워킹맘 박현정(38)씨는 “여자아이는 핑크와 인형 장난감, 남자아이는 블루와 총 같은 전형성을 깨려는 부모들이 많다. 성 중립 육아가 오히려 상대 성에 대해 이해를 키워줄 수 있고, 성 평등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키워드

성 중립성(gender neutrality)
고정된 남녀 성 역할을 전복하는 것을 넘어 아예 성별, 성차 자체를 없애버리는 개념. ‘젠더리스’와 유사하다. 패션, 언어, 라이프스타일 등을 아우른다. 교육에서도 이슈다.

성 유동성(gender fluid)
성 역할이 고정된 것이 아니듯 개인의 성 정체성도 가변적이고 선택 가능한 것으로 보는 개념. 서구 Z세대의 주요 특징의 하나로 꼽힌다.

Z세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중반 태어난 서구 세대. 나답게 사는 것이 중요한 디지털 네이티브다.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인 밀레니얼 세대(1980년~2000년생)와 겹치거나 더 어리다.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