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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개월 연속 0%대 넘지 못한 물가···정부는 또 농·축·수산물 탓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소비자 물가가 11개월 연속 0%대를 넘지 못했다. 1965년 관련 통계 집계하기 시작한 이후 최초다.

2일 통계청이 발표한 ‘11월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물가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0.2% 상승한 104.87을 기록했다. 4개월 만에 ‘플러스’로 전환했지만, 여전히 0%대 상승률이다. 물가는 올해 1~7월 줄곧 0%대를 기록하다 지난 8월 -0.04%로 사상 첫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9월에는 -0.4%로 하락 폭이 커졌다. 10월에는 0%로 보합을 기록했다. 11개월 연속 0%대를 넘지 못하는 물가 상승률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2~9월 8개월 연속 0%대를 기록한 것보다 길다.

소비자물가 11개월 연속 0%대. 그래픽=신재민 기자

소비자물가 11개월 연속 0%대. 그래픽=신재민 기자

경기 ‘체온계’ 근원물가 0.6% 상승…20년만 최저

정부가 그간 물가 하락 요인으로 꼽았던 농·축·수산물 가격이 11월에는 하락 폭이 크게 둔화했다. 11월 농·축·수산물 가격은 2.7% 하락하며 9월(-8.2%)과 10월(-3.8%) 덜 내렸다. 그런데도 저물가 상황은 여전한 것으로 분석된다. 계절적 요인에 따라 물가가 들쭉날쭉해질 수 있는 농산물ㆍ석유류 등을 제외한 물가인 근원물가지수가 여전히 낮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수 경기 ‘체온계’ 역할을 하는 이 근원물가지수는 지난달 0.6% 오르는 데 그쳤다. 사상 처음으로 소비자물가가 뒷걸음질 친 지난 9월과 동일한 수준으로 10월 상승률(0.8%)보다 떨어졌다.

근원물가 상승률 1999년 12월 이후 최저.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근원물가 상승률 1999년 12월 이후 최저.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올해가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시점을 고려하면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대를 기록할 것이 확실시되며, 연간 기준으로도 역대 최저치를 기록할 가능성이 커졌다. 연간 상승률이 1%에 못 미쳤던 것은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에 경기가 위축됐던 2015년(0.7%)과 외환위기가 덮쳤던 1999년(0.8%)이 유일하다.

장기 저물가, 생산·소비 위축 효과…정부, “일시적 요인” 

이처럼 저물가가 장기화하면 기업은 상품·서비스값이 하락할 것을 염려해 생산을 줄이고, 소비자는 물건값이 더 떨어질 것을 기대해 소비를 미루고 저축을 늘린다. 이 때문에 한국은행은 적정 물가 관리 수준을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2%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근원물가는 올해 7월을 제외하고 올해 3월부터 계속 0%대를 기록하고 있어 사실상의 디플레이션(경기 침체를 동반한 물가 하락) 초입이라는 분석이 제기돼 왔다. 상품·서비스 등 공급 요인보다 경기가 악화한 탓에 소비 부진이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이다.

이두원 통계청 물가동향과장이 2일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 브리핑실에서 11월 소비자물가동향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두원 통계청 물가동향과장이 2일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 브리핑실에서 11월 소비자물가동향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정부는 농·축·수산물 등에 의한 일시적 요인이라는 해석을 내놨다. 이두원 통계청 물가동향과장은 “지난해보다 농산물 가격 약세가 이어지고 있다”며 “다만 태풍 및 가을장마로 배추·무·오이 등 작황이 악화하면서 가격이 크게 올라 하락세가 둔화했다”고 설명했다. 11월 물가 상승률이 플러스로 전환한 것에 대해서도 “농·축·수산물이나 석유류 등이 최근 하락세가 완화된 게 이번 상승의 큰 요인”이라며 “채소류의 경우 오히려 전년 동월보다 다소 상승한 측면도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농·축·수산물 물가 가중치 낮아…전문가, “수요정책 실종”

그러나 농·축·수산물이 소비자물가 지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통계청은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판단하는 품목에 높은 가중치를 매기고, 그렇지 않은 경우 낮은 가중치를 부여한다. 460개 품목 가중치 합계는 1000이다.

11월 하락 폭이 가장 컸던 감자(-38.3%)와 마늘(-23.6%)의 가중치는 각각 0.6과 1.4다. 9월 하락 폭이 가장 컸던 무(-45.4%)와 상추(-37.1%)도 가중치가 각각 0.8과 0.6에 불과하다. 전기료(17), 도시가스(14.8) 등 공공요금과 전세(48.9), 월세(44.8) 등 보다 낮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수요 진작 정책이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일시적인 반등보다 0%대 물가가 장기화하는 추세에 주목해야 한다”며 “정부가 직접 일자리를 양산하는 등 소득주도성장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것이 소비로 이어지고 있지는 못하다”고 분석했다. 강 교수는 “저소득층의 경우 가처분 소득보다 빚에 대한 이자비용, 세금 등 비소비지출만 늘고 있다”며 “신산업을 키우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소득이 창출되는데 정부가 이 같은 수요정책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책 연구원인 한국개발연구원(KDI) 역시 지난 10월 말 보고서를 통해 “(저물가는) 정부의 복지 정책이나 특정 품목이 주도했다기보다 다수 품목에서 물가가 낮아지며 나타난 현상”이라며 “일시적 공급 요인뿐 아니라 수요 측 요인도 주요하게 작용했다”고 진단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급격한 최저임금 상승 등 정책 충격으로 기업의 고용이 줄면 소비 부진이 가속할 수 있다”며 “최근 국내총생산(GDP)을 시중통화량(M2)으로 화폐유통속도가 느려지고 있는 것도 수요가 부진해 시중에 돈이 돌고 있지 않다는 근거”라고 설명했다.

세종=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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