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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판타지 속 판타지를 찾아서 23화. 라그나로크

중앙일보

입력

혹독한 추위로 시작된 절망의 시간 끝내는 것은

북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신 토르는 요르문간드를 물리치고 쓰러지고 만다(에밀 되플러, 1905).

북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신 토르는 요르문간드를 물리치고 쓰러지고 만다(에밀 되플러, 1905).

연말이 되면 수많은 이가 한 해가 끝나는 것을 기념하고 새해가 다가오는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만일 한 해가 끝나도 새로운 해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가령 해가 끝나면서 세상이 막을 내린다면…? 오랜 옛날부터 많은 사람이 이런 걱정을 한 것 같습니다. 여러 신화 속에서 세상의 멸망을 예언하는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죠. 그중에서도 북유럽 신화에서 등장하는 ‘라그나로크’는 가장 인상적인 내용입니다.

마블 영화의 제목으로도 알려진 ‘라그나로크’는 ‘신들의 마지막 운명’ 이야기예요. 오딘을 중심으로 한 북유럽의 신들, 토르와 로키를 비롯한 모든 신이 죽음을 맞이하고 세상이 막을 내리죠. 그 이야기는 극심한 추위와 함께 시작됩니다. 3년간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겨울로 인해 세상은 혼란에 빠집니다. 두 마리 늑대에게 쫓기던 태양과 달이 늑대에게 잡아먹히고 영원한 어둠이 세상을 뒤덮게 되죠. 사로잡혔던 사악한 존재들이 풀려나고, 저승의 군단과 함께 서리와 불의 거인들이 신들의 세상으로 달려갑니다.

아스가르드의 수문장인 헤임달이 거대한 뿔피리 걀라르호른을 불며 전쟁의 시작을 알립니다. 그 전쟁은 절대로 피할 수 없죠.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오딘은 용맹하게 싸우다 죽은 바이킹의 전사들을 자신의 궁전인 발할라에 맞아들여 싸움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이상으로 용맹한 여전사 바이킹에 의해 소환된, 에인헤랴르라 불리는 전사들은 낮에는 서로 죽고 죽이는 전투를 벌이며 싸움 연습을 하지만, 해가 지면 다시 살아나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에인헤랴르의 활약으로 서리와 불의 거인, 저승의 군단은 상당수 사라져요. 본래부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들인 만큼, 죽어서도 더욱 강해져 거인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그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신들의 운명은 결코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를 지키던 헤임달이 로키와 맞서 함께 숨을 거둡니다. 이윽고 신들의 왕 오딘이 사슬에서 풀려난 거대한 늑대 펜리르에게 먹히고 말죠. 오딘의 아들 비다르가 절대로 찢기지 않는 신발을 이용해 펜리르의 입을 찢어 죽여버렸지만, 오딘을 되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전쟁의 신 티르는 가름과 맞서다 함께 숨을 거두었고, 최강을 자랑하던 천둥의 신 토르는 지구를 둘러쌀 정도로 거대한 뱀 요르문간드와 맞서 그 머리를 망치로 부수는 데 성공했죠. 하지만 토르 역시 오랫동안 싸우면서 요르문간드가 내뿜은 독기에 중독돼 죽어버렸죠.

그렇게 거의 모든 전사와 거인, 신들과 괴물이 쓰러지고, 남은 것은 풍요의 신이자 전사였던 프레이와 불의 거인을 이끄는 왕 수르트뿐. 하지만 프레이는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자랑하던 ‘스스로 움직이며 거인을 죽이는 검’은 이미 없었기 때문이죠. 거인족 미녀와 결혼하고자 하인이었던 스키르니르에게 검을 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프레이는 후회했지만, 검은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사슴뿔을 무기 대신으로 용맹하게 맞서다 수르트의 칼 앞에 쓰러지고 맙니다. 그렇게 라그나로크는 신들의 패배로 막을 내렸죠. 수르트는 불타는 칼을 휘둘러 남은 신과 거인들을 거의 모두 죽여버리고, 세상을 불태워버립니다. 오랫동안 세상을 떠받치던 세계수 위그드라실조차 수르트의 불칼에 타버리고 세상은 가라앉고 말아요.

라그라로크는, 훗날 기독교가 북유럽에 들어온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북유럽의 신앙을 몰아내고자 꾸몄다는 거죠. 하지만 한편으로 이 이야기는 북유럽의 혹독한 겨울을 상징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거대한 나무조차 말라 죽어버리고, 다시는 봄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끔찍한 겨울 말이죠. 특히 바이킹이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는 추위가 극심했던 소빙하기였다고 하는 만큼, 더욱 그럴듯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 밖에도 아이슬란드의 화산 폭발로 인한 추운 계절을 뜻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건 라그라로크는 북유럽 사람들에게 끔찍한 추위와 절망을 뜻하는 이야기죠.

하지만 라그라로크는 단지 비극적인 시기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수르트가 사라지고 모두 불타버린 줄 알았던 세상에서 새롭게 땅이 솟아오르기 때문입니다. 씨를 뿌리지 않아도 작물이 자라는 그 세상에는 수르트의 불길을 피한 여러 젊은 신들과 한때 죽었던 오딘의 아들 발드르가 되살아나 황금의 시대를 연다고 하죠. 그리고 한 숲에 숨었던 한 쌍의 인간이 다시금 인간의 삶을 이끌어나간다고 합니다. 서리와 불의 거인이 사라져 버린 세상은 오딘이 다스리던 시대보다도 더욱 풍요롭고 아름답다고 하죠. 북유럽의 겨울은 특히, 화산 폭발 이후나 소빙하기의 겨울은 우리나라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춥고도 끔찍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시간은 그들에게 라그나로크의 이야기를 가져왔지만, 그들은 그 겨울이 언젠가는 끝나고 더욱 찬란한 봄이 찾아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게 바로 끔찍한 겨울로 시작되는 라그나로크가 우리 모두에게 주는 희망이 아닐까 합니다.

글=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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