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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하늘에 점점이 박힌 감, 정말 '감'이 온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58)  

서울의 아파트를 떠나 전주의 단독주택으로 이사 온 지 9개월째, 봄, 여름, 가을을 지나 드디어 ‘마당 있는 집’ 생활의 최대 고비가 될 겨울로 접어들고 있다. 평생 살아온 곳을 떠나 낯선 도시에 정착한 소감을 밝히려면 일단 겨울까지는 지내봐야 하겠지만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만족스럽다.

기대 이상인 것, 불편한 것, 신기한 것 다 있지만 ‘서울보다 확실히 좋은 것’ 한 가지는 차를 몰고 10분만 나오면 평소에 그렇게도 하고 싶던 ‘전라도 여행’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감의 빛깔은 가을을 알려주고 가을을 느끼게 하고 가을로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가을을 떠나보낸다. 그래서 감은 시간이 ‘감’ 아닐까 하는 말장난도 해본다. [사진 Pixabay]

감의 빛깔은 가을을 알려주고 가을을 느끼게 하고 가을로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가을을 떠나보낸다. 그래서 감은 시간이 ‘감’ 아닐까 하는 말장난도 해본다. [사진 Pixabay]

지난주에도 무작정 외곽으로 나가봤다. 전주 시내를 빠져나와 북쪽으로 완주군 용진읍, 고산면으로 해서 대아저수지를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동상면, 소양면을 지나 전주로 다시 들어오는 코스는 아주 평화롭고 고즈넉했다. 도중에 위봉사, 송광사 같은 고즈넉한 절에 들를 수도 있고 저수지 변의 민물매운탕이나 유명한 화심순두부를 즐길 수도 있지만, 나의 관심사는 언제나 이쪽 지역의 ‘감나무’다.

'감나무집'은 도시에서라면 가끔 들어볼 수 있는 상호나 택호이지만 이곳에서는 있을 수 없다. 집이든, 도로변이든, 밭둑이든 감나무 없는 곳이 없으니까. 전라북도 완주는 경북 상주와 더불어 감으로 유명한데, 특히 이곳의 곶감은 조선시대 진상품이었다고 한다.

잎은 다 떨어지고 빨간 감들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점점이 박혀있는 모습을 워낙 좋아해 이맘때마다 사방에 감나무를 보러 다닌다. 마침 감으로는 전국 최고의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는 곳이 지척이니 이 가을에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늦가을에 전북 완주의 대아저수지를 한 바퀴 돌면 감으로 유명한 완주군의 웬만한 마을을 지나가면서 빨간 감이 빼곡하게 달린 감나무 구경을 실컷 할 수 있다. [사진 박헌정]

늦가을에 전북 완주의 대아저수지를 한 바퀴 돌면 감으로 유명한 완주군의 웬만한 마을을 지나가면서 빨간 감이 빼곡하게 달린 감나무 구경을 실컷 할 수 있다. [사진 박헌정]

11월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감도 예쁘고 집집이 감을 깎아 널어 말리는 정경도 예쁜 때이다. 그 그림 같은 모습에 빠져들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말장난 비슷하게 생각이 돌아간다. 감은 한자로 ‘시(枾)’이지만 ‘시(詩)’ 아닐까 생각해보고, 한글로 감은 '감(感)'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나에게 제대로 된 가을 구경은 단풍(色)보다 감(感)이다.

감의 빛깔은 가을을 알려주고 가을을 느끼게 하고 가을로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가을을 떠나보낸다. 시간이 아까운 느낌은 별로 없지만, 계절은 아깝다. 봄은 봄이라, 가을은 가을이라 아깝다.

큰 감나무에는 1,500개 넘게 감이 달린다. 믿기지 않지만 조금만 쳐다보며 세어 보면 이해된다. 화가가 붓으로 점점이 찍어 넣은 것 같다. [사진 박헌정]

큰 감나무에는 1,500개 넘게 감이 달린다. 믿기지 않지만 조금만 쳐다보며 세어 보면 이해된다. 화가가 붓으로 점점이 찍어 넣은 것 같다. [사진 박헌정]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그는 서른 즈음이라 계절 같은 것보다 떠나간 사랑이 더 그리웠을 것이다. 오십 넘은 중년으로서는 이미 떠난 것보다는 지금은 있지만 곧 없어질 것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감잎과 감이 차례로 지워지고 나면 한 해가 저문다. 그래서 감은 시간이 ‘감’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완주와 인접한 곳에 나의 시골 금산이 있다. 그곳 역시 마당, 들판, 산, 논둑, 밭둑에 온통 감나무였다. 어릴 때 우리 논가에도 하늘까지 닿을 듯이 높은 감나무가 있었는데, 지금 보면 아마 길가의 보통 감나무 정도였을 것이다.

어른들은 높은 곳의 감을 일일이 따지 않고 기다란 대나무의 끝을 갈라 감이 많이 달린 가지를 거기 끼운 후 비틀어 툭툭 끊어 내렸다. 아이들은 어른들 흉내를 내며 시도해보지만, 장대도 무겁고 손목 힘도 없어 어림없는 일이었다.

요즘은 감 깎는 기계에서 1초마다 하나씩 감이 깎여 나오지만 어린 시절에 어른들은 11월의 햇살 좋은 날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 나눠가며, 새참 드시고 놀아가며 감을 깎으시곤 했다. [사진 완주구청]

요즘은 감 깎는 기계에서 1초마다 하나씩 감이 깎여 나오지만 어린 시절에 어른들은 11월의 햇살 좋은 날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 나눠가며, 새참 드시고 놀아가며 감을 깎으시곤 했다. [사진 완주구청]

그렇게 딴 감은 필요한 만큼 남기고 대부분 팔았는데, 그 무렵에 곶감 업자가 동네마다 돌며 거둬갔다. 남긴 것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 제사에 쓸 곶감을 만들어야 하니 어느 집이든 감 깎는 것이 늦가을에 지나칠 수 없는 일거리였다.

감의 품종이 많이 바뀌었는지 요즘은 바로 깎아서 과일 맛 그대로 즐길 수 있는 단감이 많지만 어린 시절 기억으로는 감은 단단하고 떫은 땡감과 그걸 우린 연시, 모든 가공과정이 끝난 곶감, 이렇게 세 종류뿐이었다. 땡감은 가만히 놔두면 나무에서 떫은맛이 사라지고 달콤한 홍시가 되지만 한꺼번에 홍시로 따면 보관도 어렵고 그때까지 까치 같은 새들이 놔두지도 않으니 일찌감치 거둬들여 가공하는 것이다.

곶감을 깎고 남는 것은 항아리에 넣어 ‘울키면’(우리면) 떫은맛이 사라지고 달아져 출출한 겨울밤에 훌륭한 간식이 되었는데 서울에서 과자 맛에 길든 나는 시큼하고 달큼한 냄새에 고개를 돌리곤 했다.

깎아 말린 감은 하얗게 가루가 올라오면서 색이 진해진다. 요즘은 봉긋하고 위로 길쭉한 품종의 간식용 곶감이 많은데, 예전에는 제사상에 쌓아 올리기 좋은 납작한 곶감이 많았던 것 같다. [사진 완주군청]

깎아 말린 감은 하얗게 가루가 올라오면서 색이 진해진다. 요즘은 봉긋하고 위로 길쭉한 품종의 간식용 곶감이 많은데, 예전에는 제사상에 쌓아 올리기 좋은 납작한 곶감이 많았던 것 같다. [사진 완주군청]

집집이 30~40접은 보통이고, 많은 집은 200접까지 수확했다. 개수로는 2만 개다. 다섯 개씩 포장해서 파는 단감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지만 실제로 고개 들고 빽빽하게 달린 감나무를 1~2분만 세어 보면 이해된다. 큰 나무는 한 그루에 열다섯접까지 달린다고 한다.

정말 붓으로 주황 물감을 찍어 톡톡톡 점묘한 것처럼 많이 달렸다. 감은 점(點)이다. 봄에는 검은 땅에 점점이 떨어진 동백꽃이 있다면, 가을에는 파란 하늘에 점점이 박힌 감이 있다. 기막힌 대비를 이루는 이 점들을 보기 위해 때 되면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언제 단풍이 들었나 싶었는데 낙엽이 쌓이는 것처럼, 감도 이제 잎을 잃고 추워졌다. 말 그대로 가을이 ‘감’이다.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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