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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 대신 '성장률 6666%' 도전, 86학번 아닌 86년생 달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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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한 달에 하나 이상 새 건물이 올라가요. (박샛별 대표)”

“상품가가 1년 새 10배 이상 뛸 때도 있어요. (이수아 대표)”

‘젊은’, ‘폭발적인’, ‘규제 무풍지대’. 지난 몇 년 ‘동남아’ 앞에 자주 붙게 된 수식어다. 2%대에서 자꾸 낮아지기만 하는 한국의 경제성장률과 달리 동남아는 연 5~7% 성장률을 기록 중이다. 젊은 인구와 모바일 경제, 무규제를 앞세운 ‘창업의 메카’로도 주목받는다. ▶중앙일보 신년기획 [규제 OUT]

[한국의 실리콘밸리, 판교]

중앙일보는 지난 한 달간 동남아에 사업 거점을 둔 3~7년차 도약기 K스타트업 6곳의 대표들을 인터뷰했다. 이들은 왜 한국이 아닌 동남아에 둥지를 튼 것일까.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박샛별 서울언니들 대표, 김은희 쇼퍼블 대표, 이홍배 쉐어트리츠 대표, 이수아 에스랩아시아 대표, 김성진 아이템쿠 대표, 최서진 스윙비 대표. [사진 각 업체]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박샛별 서울언니들 대표, 김은희 쇼퍼블 대표, 이홍배 쉐어트리츠 대표, 이수아 에스랩아시아 대표, 김성진 아이템쿠 대표, 최서진 스윙비 대표. [사진 각 업체]

#왜 동남아인가

동남아는 1534 인구가 60%에 달하는 ‘젊은 나라’다. 6억5000만명의 세계 3위 규모 시장인데도 평균 연령은 29세다. 25% 미만의 낮은 신용카드 보급률은 되레 모바일 결제를 빠르게 확산시켰다. 이 덕에 그랩ㆍ고젝ㆍ라자다(동남아 최대 이커머스) 등 1세대 벤처는 창업 수년 만에 기업가치 5조원 이상의 유니콘이 됐다.

동남아국가연합(ASEAN) 주요 지표. 그래픽=신재민 기자

동남아국가연합(ASEAN) 주요 지표. 그래픽=신재민 기자

미얀마에서 K뷰티 커머스 플랫폼 ‘SSK’를 운영하는 박샛별(33) 서울언니들 대표는 “1~2년 전 1만원 초반대였던 고객들의 평균 구매액이 현재 1만원 중후반대가 됐다”며 “동남아에 뭉칫돈이 몰리는 걸 체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얀마 뷰티 시장의 2007~2017년 10년간 성장률은 무려 6666%다. 한국에선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폭발적인 수치다.

동남아 3개국에서 기프티콘 사업을 하는 ‘쉐어트리츠’ 이홍배(45) 대표는 “동남아 VIP로 불리는 베트남ㆍ인도네시아ㆍ필리핀 3개국 인구는 한국의 10배인 5억명이고 GDP 성장률은 6~7% 수준”이라고 전했다. 동남아는 올해 미국을 제치고 창업가 78명이 꼽은 ‘진출하고 싶은 국가’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스타트업얼라이언스 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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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엔 있고 동남아엔 없는 것

이들의 사업 아이템을 요약하면 ‘한국엔 있고 동남아엔 없는 것’이다. 한국과 동남아의 경제ㆍ문화적 간극은 약 10~20년 정도다. 그만큼 수요는 있으나 공급이 부족한 서비스가 많다. 한국에서 잘된 서비스를 벤치마킹하는 이른바 ‘타임머신형 투자’로도 성공할 수 있는 이유다.

미얀마 K뷰티 스타트업 '서울언니들'의 고객 뷰티 토크 현장. [사진 서울언니들]

미얀마 K뷰티 스타트업 '서울언니들'의 고객 뷰티 토크 현장. [사진 서울언니들]

대표적인 곳이 중소기업용 인사관리(HR) 소프트웨어 개발사 ‘스윙비’다. 최서진(33) 대표는 동남아 근로자 90% 이상이 중소기업에서 일하는데도 HR 시스템은 비싸고 낙후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창업 3년 차인 스윙비의 현재 고객사는 6500여개다. 지난해 매출은 전년보다 380% 성장했다.

인도네시아 최초의 K패션 쇼핑몰 ‘더패피’를 운영하는 김은희(32) 쇼퍼블 대표는 “인니 ‘패션피플’ 친구들을 따라 싱가포르에 쇼핑 갔더니 죄다 동대문 옷이었다”는 점에서 기회를 봤다. 투자사 매쉬업엔젤스의 최윤경 팀장은 “인니 패션 시장은 25조원 규모로 중·상류층을 중심으로 온라인 시장이 커지고 있다”며 “저품질 제품이 대부분인 시장에 고품질의 동대문 의류를 들여온 점에서 성장이 기대되는 회사”라고 말했다.

#현지화 대신 현지행

많은 한국 기업이 ‘현지화 전략’으로 동남아에 진출한다. 하지만 여섯 대표는 “처음부터 동남아에서 사업 기회를 찾았다”고 말한다. ‘현지행’을 택한 것이다. 그 뒤엔 시장 선점으로 선두기업이 되겠다는 창업가의 청운지(靑雲志)가 있었다.

게임ㆍ운동화 등 마니아 기반 e커머스 ‘아이템쿠’김성진(40) 대표는 “한국과 가까운 아시아권, 시장 규모가 크되 인터넷 산업이 덜 성숙한 곳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해 처음부터 인도네시아를 골랐다”고 밝혔다. 실제 인도네시아는 세계 17위(매출 1조3000억원) 게임 시장을 기반으로 ‘덕질’ 문화가 왕성한 나라 중 하나다.

인력도 대부분 현지인을 쓴다. 아이템쿠는 대표와 최고기술경영자(CTO)를 제외한 전 직원이 현지인이다. 6개사의 현지 직원은 한국 직원보다 약 3~18배 많다. “현지 서비스는 한국인이 아무리 일을 잘해도 현지인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홍배 대표)”이다.

모바일 기프티콘 결제 시스템이 없던 동남아에 기프티콘 사업을 흥행시킨 쉐어트리츠는 대부분 현지 직원으로 구성돼있다. 가운데 파란 셔츠가 이홍배 대표. [사진 쉐어트리츠]

모바일 기프티콘 결제 시스템이 없던 동남아에 기프티콘 사업을 흥행시킨 쉐어트리츠는 대부분 현지 직원으로 구성돼있다. 가운데 파란 셔츠가 이홍배 대표. [사진 쉐어트리츠]

비용절감 효과도 크다. 베트남 엑셀러레이터 VSV의 송승구 파트너는 “베트남의 대졸 초봉은 월 40~50만원, 귀하다는 개발자 월급도 70만~100만원이라 초기 비용이 덜 든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여섯 대표가 동남아 창업을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현지 문화의 흡수다. 모두 1~2년 이상의 현지 회사 근무 내지는 4~7년간 글로벌 사업을 맡았던 경력이 있다.

동남아 K스타트업 대표들의 현지 경력.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동남아 K스타트업 대표들의 현지 경력.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신선식품 물류 스타트업 ‘에스랩아시아’는 말레이시아ㆍ싱가포르ㆍ태국ㆍ홍콩에 법인을 두고 있다. 이수아(33) 대표가 현지 맞춤형 서비스를 위해 5개국에서 딴 통관 라이선스만 300개다. 뜨거운 동남아에서도 산지~배송지 간 온도 차를 5도 내로 맞추는 특제 배송 ‘그리니박스’가 핵심 기술이다. 현재까지 배송한 상품 수만 50만개가 넘는다.

에스랩아시아는 온도·습도·조도·파장을 제어해 생물을 24시간 살리는 특제 배송박스 '그리니박스'로 동남아에서 물류사업에 성공했다. [사진 에스랩아시아]

에스랩아시아는 온도·습도·조도·파장을 제어해 생물을 24시간 살리는 특제 배송박스 '그리니박스'로 동남아에서 물류사업에 성공했다. [사진 에스랩아시아]

#8687년생

이해진ㆍ김범수 등 판교 IT업계의 주역들이 86~87학번이라면, 동남아 창업 시장을 이끄는 대표들은 86~87년생의 젊은 30대들이다. 박샛별ㆍ이수아ㆍ최서진 대표가 86년생, 김은희 대표가 87년생이다. 김성진(79년생)ㆍ이홍배(74년생) 대표의 경우 LG유플러스 등 유력 기업 2~3개사를 거쳤다.

'IT업계 황금학번'으로 불리는 서울대 85~87학번 창업자들. 김택진(전자공학85), 김범수(산업공학86), 김정주(컴퓨터공학86), 송재경(컴공86), 이해진(컴공86). [사진 서울대 총동창회]

'IT업계 황금학번'으로 불리는 서울대 85~87학번 창업자들. 김택진(전자공학85), 김범수(산업공학86), 김정주(컴퓨터공학86), 송재경(컴공86), 이해진(컴공86). [사진 서울대 총동창회]

이중 김성진 대표와 최서진 대표는 판교 출신이다. 김 대표는 NHN게임스에서 글로벌 게임포털 사업을, 최 대표는 안랩에서 동남아 6개국 사업을 맡았었다. 김 대표는 “김대일 펄어비스 의장 등 동료들이 창업하고 성공하는 걸 보며 자연스레 창업에 관심을 가졌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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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점은

물론 쉬운 길은 아니다. 법인 설립, 수입 통관 등 외국 기업이 겪어야만 하는 법적ㆍ행정적 제약이 가장 큰 장벽이다. 김은희 대표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뒷돈을 요구하거나, 돈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 현지문화 때문에 현지인이라면 쉽게 해결할 일을 어렵게 해결해야 할 때가 많다”고 털어놨다.

인도네시아의 취미 기반 리셀 e커머스 '아이템쿠'의 월 거래규모는 20억원 수준이다. 1020 남성이 고객의 80%다. 내년에 태국 법인 설립을 앞두고 있다. [사진 아이템쿠]

인도네시아의 취미 기반 리셀 e커머스 '아이템쿠'의 월 거래규모는 20억원 수준이다. 1020 남성이 고객의 80%다. 내년에 태국 법인 설립을 앞두고 있다. [사진 아이템쿠]

미흡한 제도와 통계도 문제다. 김성진 대표는 “여느 개발도상국처럼 공신력 있는 수치를 찾기 정말 어렵다”며 “예컨대 한국은 대졸자 초봉과 급여 인상률의 범위가 정해져 있다면, 인도네시아는 인력별 수준과 급여 차도 크고 인상 폭도 넓어 급여를 책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류 프리미엄

인도네시아 K패션 스타트업 쇼퍼블에는 국내 유명 쇼핑몰 30여개사가 입점해있다. [사진 쇼퍼블]

인도네시아 K패션 스타트업 쇼퍼블에는 국내 유명 쇼핑몰 30여개사가 입점해있다. [사진 쇼퍼블]

외국인 차별은 없냐고 묻자 오히려 ‘한국 프리미엄’이 있다고 답했다. 배타적 단일문화가 강한 한국과 달리 다문화 사회의 역사가 긴 데다, 한류의 인기에 힘입어서다. “한국 연구소가 개발한다는 것만으로 기대가 크다(최서진)”, “현지인들이 로컬 서비스보다 한국 서비스를 선호한다(이홍배)”, “투자사가 한국인을 근면하고 스마트한 워커홀릭으로 본다(김은희)”는 경험담이 잇달았다.

#해외창업 지원 적어

한편 6개사는 “한국 스타트업의 진출이 많지 않아 정보 커뮤니티도 적고 혼자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최 대표는 “세계 각국에서 인재들이 몰려와 창업하는 동남아 시장에 유독 한국계 스타트업이 적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다른 대표들 또한 후배 스타트업에게 디딤돌 역할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송 파트너는 “연륜 있는 해외 창업자들이 현지 문화에 더 밝은데도 정부의 창업 지원은 국내 스타트업과 국내에서 시작해 해외로 진출하는 기업에만 집중돼있다”며 “재외 스타트업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동남아 휩쓰는 K스타트업.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동남아 휩쓰는 K스타트업.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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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민 기자 kim.jungmin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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