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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덕진의 퍼스펙티브

고령화 진행될수록 사회적 연대와 신뢰 줄어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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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세계가치관조사에서 드러난 고령화와 국민 가치관 변화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고령화 이후의 세상은 어떤 곳일까.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한국의 고령화와 관련해서 주로 경제적이고 물리적인 변화들을 걱정한다. 고령 인구가 많아지고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드니 소득세 낼 사람이 줄어들 것이고 따라서 재정은 압박을 받고 세율은 올라가지 않을까?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드니 고용하고 싶어도 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고 따라서 소비는 줄어들고 경제는 더 나빠지지 않을까? 학령인구는 이미 빠르게 줄어들어서 해마다 수능 응시생 수는 신기록을 경신하며 줄어들고, 결국 문 닫는 대학이 속출하면서 교육은 일대 혼란에 빠지지 않을까? 소위 인구절벽론이다. 인구절벽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해야 출산을 늘리고 인구절벽을 피해갈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고령화율 높을수록 사회의 역동성 떨어지고 #타인이 희생해야 잘 살 수 있다는 생각 늘어 #청원·보이콧·시위 등 비제도적 참여 늘어나나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 믿음은 더 깊어져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가 있다. 인구가 몇 명이 되었든, 그 인구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까이다.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느냐가 결국 그 사회의 수준과 질을 결정하고, 그 세상이 얼마나 살만한 세상인지를 결정하니 말이다. 세상이 살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회에서 출산이 늘어날 리 만무하다.

고령화라는 관점에서 한국의 미래를 미루어 짐작하기에 좋은 나라가 일본이다. 고령화 속도는 우리가 일본보다 빠르지만, 현재 얼마나 고령화된 상태인지 비교하면 일본이 우리보다 20~25년 앞서 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러니 지금의 일본을 보면 한국 고령화의 미래를 어느 정도 짚어볼 수 있다.

2006년 일본에서는 ‘불량노인구락부’라는 게 생겼다<이코노미스트 2014년 5월 19일 자 ‘일본의 불량노인 운동-“왜 남의 눈치 보며 사나요?”’>. 첫 모임의 슬로건은 “뻔뻔한 할머니들에게 대항해 세상을 바로잡자”였다고 한다. 이 모임에서는 그동안 했던 불량스런 행동을 자랑하는데, 포인트 제도도 있다. 거리에 침 뱉기 0.1점, 술 취하기 1점, 청년들과 어울려 다니기 2점, 혼자 여행가기 10점, 젊은 애인 만들기 100점이란다. 그런데 여행 갈 때 아내와 동행하면 -30점이다. 누적 포인트 1000점이 되면 ‘큰 형님(大兄)’ 대접을 받는다.

한국의 노인 혐오 우려스러운 수준

적은 수의 경제활동인구가 예전보다 훨씬 많아진 노인들을 부양하는 것은 부담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고, 노인을 보는 시선도 곱지 않아질 가능성이 크다. 일본에서는 노인을 혐오하는 사회를 뜻하는 혐로사회(嫌老社會)라는 단어가 등장한 지 오래다. 최근 한국의 노인 혐오도 우려스러운 수준이다.

그러나 노인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 지금의 노인들은 대체로 산업화 시대에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 나라를 세우고 가정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노인이 되어 있는데, 나이를 먹은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면 노인도 젊은 세대를 곱게 봐야 할 이유가 없다. 젊은 세대를 같이 미워하고 사회 질서를 존중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주위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살아 있더라도 병들어 만나지 못하거나, 혹은 부담스러워하는 젊은 세대의 외면을 받는다. 연고가 없는 무연사회(無緣社會)의 등장이다. 고독사가 늘어나서 세상을 떠난 지 한참 지나서 시신이 발견되고, 남은 가족들은 시신 인수를 거부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까.

일본은 우리가 참고하기에 좋은 사례이지만, 좀 더 시야를 넓혀 세계 여러 나라가 고령화 진전에 따라 어떤 가치관 변화를 보여왔는지를 추적해보자. 통계학에 ‘평균으로의 회귀(regression toward the mean)’라는 개념이 있다. 평균은 평균일 뿐 개별 사례와는 다르지만, 개별 사례가 평균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확률은 지극히 낮다. 그러니 여러 나라의 패턴을 보면 한국 고령화의 미래가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세계 사회과학자들이 100개가량의 국가를 대상으로 사회문화적·윤리적·종교적·정치적 가치를 조사하는 학술 프로젝트 세계가치관 조사(World Values Survey)를 진행하고 있다. 이 조사에서 약 30년 동안 조사 대상 국민의 가치관 변화를 그 나라의 고령화율(65세 이상 인구 비율)과 연동해서 분석한 결과, 몇 가지 중요한 발견이 얻어졌다.

고령화가 인권과 자유에도 부정적 영향

첫째, 우려했던 대로 고령화율이 높을수록 노인을 우호적으로 보거나 존경한다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든다. 부모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고령화와 함께 낮아지는데 노인 세대보다 젊은 세대에서 그 하락 속도가 두 배나 빠르다. 그런데 피해를 보는 것은 노인뿐이 아니다. 2030 젊은이들의 사회적 지위나 그들의 성과에 대한 평가도 함께 낮아진다. 노인도 젊은이도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이다.

둘째, 도전 정신이 희박해지고 사회의 역동성이 떨어진다. 직업을 선택할 때 업무의 주도권을 가질 기회, 무언가를 성취할 기회, 새로운 것을 배우는 기회가 중요하다는 응답도 낮아진다. 경쟁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늘어나고 노력이 아니라 운이 성공을 좌우한다고 믿게 된다. 함께 노력하면 모두가 잘살 수 있다는 생각은 줄어들고 다른 사람을 희생하지 않으면 잘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늘어난다.

셋째, 우리가 만들어 놓은 주요 제도에 대한 믿음이 희박해지고 한때는 중요하게 인정받았던 명분과 대의(大義)도 예전처럼 인정받지 못한다. 대의제 정치에 대한 관심은 늘어나지 않지만, 청원·보이콧·시위와 같은 비제도적 정치 참여는 늘어난다. 종교단체·군대· 교육기관·언론·노동조합·의회·정부·정당·대기업·환경운동·여성운동 등에 대한 신뢰가 모두 낮아진다. 특히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은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종류의 사회운동은 그들이 주장하는 대의명분에 대한 사회적 동의와 그로 인한 연대(連帶)가 중요한데, 그러한 공감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고령화는 경제성장이 가져온 바람직한 사회적 변화 중 상당수를 무효화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고령화된 사회들은 얼핏 보면 예전보다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더 많이 인정하고 인권과 자유를 앞세우는 탈물질주의가 늘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들은 대개 고령화와 밀접하게 관련된 경제성장의 효과이고, 경제성장 효과를 제거하고 보면 고령화의 순수한 효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고령화의 우울한 전망 바꿔야 저출산 극복

여기까지가 우울한 전망이라면 좀 덜 우울한 전망도 있다. 고령화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은 조금씩이나마 더 깊어진다. 민주주의가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제도이기 때문에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든가 군대가 나서야 한다든가 지도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응답은 고령화와 더불어 유의미하게 줄어든다. 또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는 응답은 계속 늘어난다.

모르긴 해도 이런 것들이 우리가 조만간 살아가게 될 세상의 모습이다. 우리가 세계 여러 나라가 경험한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고령화를 걱정하고 예측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그에 대비하는 것이다.

출산정책에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어도 출산은 갈수록 줄어들기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세상이 살만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살만하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갈 내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이 안 들기 때문이다. 저출산 극복을 위해 최선의 대책은 앞서 언급한 우울한 전망을 바꿔 놓는 것이어야 한다.

키워드

세계가치관 조사(World Values Survey)
전 세계 수천 명의 사회과학자들이 1981년부터 전세계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100개가량의 국가를 대상으로 국민 가치관 변화가 사회·정치적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조사하는 학술 프로젝트다. 본부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다.

불량노인구락부
불교 조각가 세키 간테이가 쓴 『불량 노인이 되자』라는 책에서 영감을 받아 2006년 결성된 일본의 노인 모임. 노인이라고 점잔만 떨지 말고 몸이 원하는 대로 하자는 게 신조다.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메이와쿠(迷惑)’ 사회인 일본에 충격을 줬다.

혐로사회(嫌老社會)
고령사회인 일본에서 2010년을 전후해 등장한 신조어. 노인세대에 비해 인구도 적고 돈도 없는 청년들은 노인들이 평생 호시절을 보내고 노후 복지마저 알뜰하게 챙긴다며 비판한다. 한국에서도 최근 ‘틀딱’ ‘연금충’ ‘노인충’ 등의 비속어가 등장했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