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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길영의 빅 데이터, 세상을 읽다

랜선축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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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송길영 Mind Miner

송길영 Mind Miner

스마트폰 속 메신저 버튼을 이리저리 누르던 중 오늘 생일을 맞은 친구 리스트에 낯익은 이의 얼굴이 보입니다. 바쁜 생활에 늘상 만나긴 어려웠는데 메신저 속 프로필 사진들로 그간의 생활을 알게 되니 더욱 반갑습니다. 밥이라도 한 끼 하자 하고 싶었지만 그 집 아이의 입시가, 그의 생업이, 친구네 식구끼리의 유대가 신경 쓰여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오랜만의 전화 통화에 “별일 있어?”라고 묻는 물음이 나오면 “아니, 그냥” 이라고 하는 일이 지극히 드물어지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잊고 살던 친구가 불현듯 보낸 카톡 메시지에 무슨 일일까 불안해하고 있자니, 답이 오지 않을까 봐 불법 다단계나 금융상품 판매의 목적이 아니니 안심하고 대답하라는 메시지가 추가된 인터넷 유머가 생각납니다.

어릴 적 친구는 대문 밖에만 나가면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 동네 수십명도 안 되는 친구가 모든 관계의 끝이던 어린 시절엔 왕따만큼 끔찍한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밀린 숙제를 하는 친구의 방을 찾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책장에 꽂힌 잡지를 몇 권이고 읽다가 잘 있으라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친구를 불러서 놀다가 어느덧 낮잠에 빠져들어 집에 온 손님을 무안하게 하였다 누나에게 꾸중 들은 기억까지도 있습니다. 예절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어린 시절 막역한 관계에 대한 추억입니다.

이제 맥없이 만나는 것은 쑥스러운 나이가 되었습니다. 나이를 들어가며 차츰 늘어나는 인연들은 필연적으로 만남의 농도를 옅게 만듭니다. 어느덧 목적이 없으면 그냥 만나기가 어색한 상황으로 변질되어 ‘인맥’이라는 왠지 의도가 수상한 단어가 관계에 따라오기까지 합니다.

빅 데이터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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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 속 반가운 친구에게는 따뜻한 커피 두 잔과 조각 케이크를 보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큰 선물도 챙기지 못하고 객쩍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도 부끄러워 전자 카드에 생일 축하 메시지를 넣어 보냈습니다. 내가 보낸 메시지의 조각 조각이 친구를 통해 그의 친구로, 그리고 다시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자주 보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이따금 생각만 해도 빙그레 웃음이 나는 추억을 소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 보아도 서로 알던 마음은 하루 종일 붙어서 경험을 함께하고 희로애락을 공유하던 어린 시절의 보너스였습니다. 먹고 사는 게 바쁘고 해야 할 의무가 많아 몇 년이나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친구에게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크기가 커진 만큼 밀도가 낮아진 관계의 실타래가 끊어질까 두려워 메신저로 전달되는 조각 케이크 속 설탕을 녹여 인연을 이어나가고 싶어하는지도 모릅니다.

이 작은 메시지로 친구에게 진 마음의 빚을 모두 갚지 못할 것이란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저 친구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애정이 그의 팍팍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웃을 수 있는 작은 핑계로 전달되기를 바라기 때문일지도, 그리고 보낸 커피 두 잔을 함께 나눌 그의 지인에게 내 친구가 그래도 잘 살아왔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싶어서 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의 마음속 한 구석에 자리 잡은 나의 흔적이 옅어지는 속도를 조금은 늦추고 싶어서일까요. 별것도 아닌 기프티콘을 수줍게 보내며 지난 추억에 새삼 그리워집니다.

송길영 Mind Mi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