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적 비례’ EU 직불금은 미친 짓, 한국이 반면교사 삼아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63호 08면

앨런 버크웰 임페리얼칼리지런던 명예교수가 EU 농업정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앨런 버크웰 임페리얼칼리지런던 명예교수가 EU 농업정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농지 면적에 따라 지급하는 유럽연합(EU)의 현행 농업 직불금 제도는 미친 정책이다. 과잉 생산과 농가 소득 불균등 심화 등을 불러왔다. 한국 역시 다음 세대에도 농촌을 유지할 것인지, 농촌에서 무엇을 생산할 것인지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부터 이끌어내야 한다. 농업 현대화를 통해 효율성을 높이고 환경 오염, 기후변화 등에 대응하는 방향으로 직불금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농가 수입 중 보조금이 30% 넘어 #소득 불균형 심화, 과잉 생산 초래 #땅 많이 가진 농민, 페라리 몰기도 #‘논의 존재 이유’ 사회적 합의 필요 #환경 감안한 공익 직불금 늘리고 #농산물 고급화, 인프라 개선해야

앨런 버크웰(72) 임페리얼칼리지런던 명예교수는 “농업이 자연환경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고, 긍정적 영향을 극대화하는 것이 농업 정책의 가장 큰 목표가 되야한다”고 강조했다. 버크웰 교수는 지난 26일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대통령 직속 농어업·농어촌 특별위원회(농어업특위) 주최로 열린 ‘농어업·농어촌의 새로운 가치와 정책 전환을 위한 국제심포지엄’ 참석차 방한했다.

버크웰 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시장 안정화, 환경 및 문화 경관에 대한 지불, 농촌 발전 촉진, 그리고 개혁 이행기의 적응 지원이다. 90년대까지 EU 농정은 설탕에 600% 관세를 매길 정도로 수출 보조금 중심이었다. 그 결과 생산 과잉으로 환경 문제가 심해졌고, 정부 지출도 너무 많아졌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직불금 위주의 소득 보전 정책(P1)과 농촌 개발을 통한 구조개혁(P2)의 두 축으로 공동농업정책(CAP)을 펼쳐야 한다고 제안했다.”
왜 EU 농정이 실패라고 평가하나.
“농가 소득보전 차원에서 선택한 ‘보상적 직불제’ 방식을 20년이 넘도록 유지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물론 생산량에 따라 지급하는 방식(커플링)에서 2005년 이후 생산량과 관계없이 일정액을 지급하는 방식(디커플링)으로 바꾸는 등 개선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넓은 땅을 가진 농가에 유리하다. 최근 프랑스의 한 농가에서 13만6500유로(1억8000만원)짜리 페라리 승용차 판매 광고를 신문에 내면서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직불금 없이도 페라리를 살 수 있었겠느냐는 비판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개선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EU 농가 소득 중 직불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30%를 넘는다. 덴마크는 70%, 스웨덴·아일랜드 등은 50%에 달한다. 정치인들과 농민들은 변화를 원치 않는다. 반면 농가당 평균 농지 규모가 1헥타아르(ha) 이하인 폴란드나 루마니아 농민들은 직불금 규모가 너무 작아 의미가 없다.”
대안은 없나.
“직불제의 방향성에 대한 두가지 시각이 있다. 정보기술(IT)의 발달에 따라 로봇, 바이오 기술 등을 활용한 새로운 농업혁명이 온다. 농민들은 농약과 비료의 사용을 줄이고 탄소 배출과 대기·토양·수질 오염을 최소화하면서 농업의 효율성을 높이는데 예산을 써야 한다고 본다. 소득 보전에 무게를 둔 것이다. 환경론자들은 자연 친화적인 농업을 강조한다. 당뇨·비만 등이 만연하는 상황을 감안해 생산이 줄어드는 만큼 소비를 줄이자는 것이다. 직불금은 유기농을 확대하고 농지를 습지와 토탄층으로 바꾸는데 써야한다는 것이다. 농촌 개혁을 강조하는 셈이다.”
EU에서는 어떤 길을 가려고 하는가.
“환경 문제를 감안한 공익적 직불금을 강화하고 있다. 소득보전 직불금의 30%를 작물 다각화, 영구초지·휴경지 등에 지급하고 들판에 줄지어선 나무, 배수로, 전통 돌담 등을 보존하는 조건으로 추가 보조금을 주는 등의 정책을 도입했다. 여러분이 보는 독일이나 이탈리아 농촌의 고즈넉한 모습은 결국 이런 직불금으로 이뤄진 풍경인 셈이다. 하지만 생산량을 늘려서 더 많은 사람을 먹여살려야 할지, 생산을 줄여서 소비도 줄여야 할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는 아직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 바람직한 농정 방향은.
“EU의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농민들의 소득은 늘 사회의 평균보다 적다. 이들이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돈은 세금에서 나온다. 유럽처럼 소득 보전만 생각하면 장기적으로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쌀 값이 낮아도 논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사회적인 합의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 세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다. 환경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대한 정당한 대가, 고급화를 통해 질 좋은 농산물을 공급하는 것, 인프라 구축을 통해 다음 세대가 살아갈 수 있는 농촌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직불금 제도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농민의 평균연령이 64세에 달하는 반면 농가당 평균 농지면적은 1.5ha에 불과하다.
“나이 든 농민에 대한 사회안전망을 갖추면서 농업 효율성을 높이는 것은 어려운 과제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경자유전’ 원칙을 강조한다고 들었다. 현재 농민들이 은퇴한 뒤 임대나 계약농 등 농지 활용 방안을 생각해봐야 한다. 영농기업이 농민들의 땅을 빌려서 대규모로 농사짓는 우크라이나의 경우를 참고해 볼 만하다. 농지 소유자들은 영농기업에서 일하거나 의사·공무원 같은 직업을 갖고 파트타임으로 농사를 짓기도 한다.”

김창우 기자 changwoo.kim@joongang.co.kr
앨런 버크웰 1947년생으로 영국 맨체스터대학에서 농경제학을 연구한 뒤 임페리얼칼리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유럽환경정책연구소(IEEP) 선임연구원이다. 1990년대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의 의뢰에 따라 9인의 학자·공무원으로 구성된 농정 연구위원회 의장으로 활동했다. 그 결과로 내놓은 ‘버크웰 보고서(1998)’는 현재 EU 농정의 토대가 됐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