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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 목욕하며 한국말 배운 나카소네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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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정치의 총결산’을 내걸고 일본 국내정치와 외교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가 별세했다. 향년 101세.

1986년 미국을 방문한 나카소네 일본 총리가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레이건 대통령의 안내를 받고 있다. [중앙포토]

1986년 미국을 방문한 나카소네 일본 총리가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레이건 대통령의 안내를 받고 있다. [중앙포토]

일본 언론들은 그가 이날 오전 7시쯤 요양 및 치료차 머물던 도쿄 시내의 병원에서 타계했다고 보도했다.
1918년 5월 27일 군마(群馬)현 다카사키(高崎)시에서 태어난 고인은 도쿄제국대(도쿄대의 전신)법학부를 졸업한 후 옛 내무성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1983년 전후 총리론 처음으로 한국 공식 방문 #연설 3분의1 한국어로…"노란셔츠~"도 열창 #"오른손 미국,왼손은 한국잡고 돌진하려 했다" #'전후 일본정치 총결산'내걸고 큰 족적 남겨 #강력한 미일관계 구축,'론-야스 시대'열고 #국내적으로는 강력한 구조개혁 밀어부쳐 #야스쿠니 참배,헌법개정 추진'보수 본류'

지난해 일본 도쿄에서 서울국제포럼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세계평화연구소'가 공동주최한 제9회 도쿄-서울 포럼에 참석한 이홍구 전 총리와 나카소네 전 총리(왼쪽부터). 서승욱 특파원

지난해 일본 도쿄에서 서울국제포럼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세계평화연구소'가 공동주최한 제9회 도쿄-서울 포럼에 참석한 이홍구 전 총리와 나카소네 전 총리(왼쪽부터). 서승욱 특파원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전 직후인 1947년 28세 때 중의원에 처음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고, 이후 20회 연속 당선하는 기록을 세웠다.
1959년 현 아베 신조(安倍晋三)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내각때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첫 입각했다. 이후 방위청 장관, 통산상, 자민당 간사장·총무회장 등의 요직을 지낸 뒤 1982년 11월 제71대 총리 자리에 올라 73대까지 연속 재임했다.

그의 총리 재임 기간(1982년 11월27일~1987년 11월6일)은 1806일로 전후 5번째로 길다.

총리재임 시절 일본 국내적으로는 행정개혁의 기치를 들었다. ‘증세 없는 재정 재건화’을 위해 철도와 전기공사, 전매 공사들의 민영화에 몰두했다.
또 외교적으로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긴밀한 신뢰관계를 구축해 이른바 ‘론-야스 시대’(두 정상의 이름을 앞 글자를 딴 것)를 열었다. 무역불균형 등의 문제로 크게 흔들렸던 미·일 관계를 반석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통치방식과 관련해선 '대통령제 총리'로 불릴 정도로 실행력을 크게 강조하는 톱 다운 방식의 국정 운영을 선호했다.
퇴임 이후에도 의원직을 유지하며 막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89년 5월 '리쿠르트 스캔들'에 연루돼 중의원에 증인으로 소환될 위기에 처하자 자민당을 탈당했다가 2년 만에 복당하는 우여곡절도 있었다.
이후 2003년 11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당시 총리가 '중의원 비례대표 73세 정년제'를 앞세워 사실상의 퇴진을 요구하자 56년간의 의원 생활을 정리했다.

1983년 1월 전후 일본 총리로는 한국을 첫 공식 방문한 나카소네 총리가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의 만찬에서 건배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1983년 1월 전후 일본 총리로는 한국을 첫 공식 방문한 나카소네 총리가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의 만찬에서 건배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고인은 한국과의 관계에도 특히 공을 들였다.
1983년 1월 전후(戰後)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공식 방문했다. 총리에 취임한 뒤 첫 방문국으로 한국을 선택한 것이었다. 82년 터진 교과서 문제 등으로 양국 관계가 흔들렸을 때였다. 그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새로운 차원의 양국 관계를 열자'고 합의했다. 대한(對韓) 경협자금 40억달러 지원도 결정했다. 그는 당시 공식 만찬 연설의  3분의 1 정도를 “여러분,안녕하십니까”로 시작되는 한국어로 했다. 예정에 없던 일본 총리의 한국어 연설에 많은 참석자들이 눈시울을 붉혔다는 일화다.

나카소네 총리가 1983년 1월 방한때 만찬석상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나카소네 총리가 1983년 1월 방한때 만찬석상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한국어 연설을 위해 집에서 목욕을 할 때도 한국어 학습 테이프를 틀어놓았고, 틈 날때마다 양복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단어 카드'를 꺼내 한국어 공부에 열중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만찬 뒤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베푼 ‘2차 연회’에서는 ‘노란셔츠 입은 사나이’를 한국어로 불렀고, 전 대통령도 일본 노래를 답례로 불렀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훗날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서 생활할 때 나카소네 전 총리는 몰래 양말과 음악CD,양갱을 보내기도 했다. 거의 매년 여름 휴양지인 가루이자와(軽井沢)로 전 대통령을 초대해 친분을 이어가기도 했다. 또 한국 정치인 가운데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JP), 박태준 전 총리 등과도 두루 가까웠다.
2005년 도쿄 게이단렌회관에서 열린 양국 국교정상화 40년 기념행사때는 40년 지기인 JP와 나카소네 두 사람이 양국을 대표해 무대에 섰다.

지난 97년 당시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방한중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와 조찬을 함께 했다.[중앙포토]

지난 97년 당시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방한중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와 조찬을 함께 했다.[중앙포토]

당시 나카소네 전 총리는 총리 취임후 첫 출장지로 한국을 택한 이유에 대해 “오른손엔 미국, 왼손엔 한국의 손을 쥐고 일·미·한 세 나라가 태평양 국가로 돌진하자는 것이 나의 외교 전략이었다”고 소개했다. 또 위안부 문제로 양국이 충돌하던 2015년(당시 97세)에는 일본을 찾은 이홍구 전 총리, 김수한 전 국회의장 등에게 "한일 관계가 정말 좋아지려면 일본의 한국의 두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현역 한국 정치인들중엔 바른미래당 지상욱 의원이 고인과 인연이 깊다.

1993년 12월 도쿄대 유학시절 바른미래당 지상욱 의원이 나카소네 전 총리와 만나 인사를 나눴다. [사진=지상욱 의원 제공]

1993년 12월 도쿄대 유학시절 바른미래당 지상욱 의원이 나카소네 전 총리와 만나 인사를 나눴다. [사진=지상욱 의원 제공]

이렇듯 한국과의 관계에도 힘을 쏟은 고인이었지만, 이념적으로는 ‘강력한 보수'의 길을 걸은 정치인이었다.

그는 1985년 8월 15일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A급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했다.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면서 이후엔 참배를 중단했다.
대표적인 개헌론자이기도 하다.
총리 퇴임이후, 90세가 넘어서도 새로운 헌법 제정을 추구하는 초당파 의원 모임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일본내에선 “총리가 되기전에 노트 20권을 빼곡하게 채울 정도로 준비를 했다”,”늘 책을 가까이하고 공부를 했다”는 '공부하는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평소 "바르게 생활하고 삼라만상에 관심을 갖는 게 내 장수의 비결"이라 했다. 아침엔 야채스프와 일본전통 발효식품인 낫토를, 점심엔 바나나 혹은 메밀국수 반 접시를 즐겼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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