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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주, 그 시인은 나를 방으로 데려간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전새벽의 시집읽기(48)

문학은 기본적으로 멋을 부리는 것이다. 그 ‘멋’ 덕분에 문학이 존립한다. 시는 그 멋을 한 줄 문장에 담는다. 교과서식으로 말하면 ‘촌철살인,’ 힙합식으로 말하면 ‘펀치라인,’ 문학평론가식으로 말하자면 ‘독자를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문장’이 잘 쓰인 시에는 있다.

필자는 촌스러운 탓에, 그것을 ‘한 방’이라고 부른다. 내친김에 젊은 시인들의 ‘한 방’ 좀 볼까. 신철규(1980~)는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 엎드려 울 수 밖에 없다”라고 쓴다(「눈물의 중력」). 박준(1983~)은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 우리에게도 있었다”라고 쓴다(「마음 한철」). 황인찬(1988~)은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라고 쓴다.(「무화과 숲」).

멋 때문에 생긴 반대급부도 있다. 내용은 없고 멋 부리기에만 급급한 작품들도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진다. 이런 세태 속에서는 멋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강렬한 시를 쓰는 시인이 귀감이 된다. 유용주(1960~)가 좋은 예다. 그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중국집, 술집, 공사판을 떠돌며 치열하게 살았다. 극도로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 특유의 무덤덤함인가, 그의 글은 치열하지 않다. 오죽하면 「슬픔에 대하여」라는 시까지, 참 무덤덤하게 쓰였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살아온 시인 유용주의 시에는 특유의 무덤덤함이 있다. [사진 pxhere]

지독한 가난 속에서 살아온 시인 유용주의 시에는 특유의 무덤덤함이 있다. [사진 pxhere]


지리산 종주를 하다 만난 안종관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채 쉰을 못 채우고 돌아가신 시인 윤중호 형수가 마포 합정동 부근에다 식당을 냈다고 한번 갈아주러 가자고 한다 비빔밥 전문점, 그간의 사정을 알고도 남겠다 언제 서울 올라가면 한번 가보자, 소주 서너 잔에 볼그족족 말씀하셨다 합정동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중호 형 편집 사무실이 있던 곳이다
처가에 가서 공부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 사정을 말 하고 밥 먹으러 갔다 화평동 냉면집에서 돼지갈비와 왕냉면을 먹었다 불현듯 아내가 끼고 있던 반지를 장모님께 자랑했다 부부의 날 기념으로 이이가 선물한 것이라고…… 모두들 부러워 하는 눈치다 사실, 그 반지는 친구가 술김에 사서 선물한 것이었다 아내의 자존심을 생각하자 육수처럼 끓었다

외국인 결혼 이주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친 지 두어 달이 됐다 하루는 집으로 전화가 왔다 서투른 한국말이었다 선생님, 저 무까리예요 저, 화원을 열었어요 꽃집이라는 말은 아주 멀리 있었다 무까리 친정어머니가 이역만리 고향에 있듯, 부영아파트 앞, 부영화원이에요 개업인데, 전화할 곳이 선생님밖에 없어서…… 뒷산 숲속에서 소쩍새가 섧게 울었다 나는 결국 개업식에 가지 못했다 먼 남쪽 바닷가 대안학교에 다니는 딸아이를 데리러 가려던 참이었다 무까리……. 부영화원…… 그리고 봄꽃 피었다 지는 5월


-유용주, 「슬픔에 대하여」 전문.

(시집 『서울은 왜 이렇게 추운 겨(문학동네, 2018)』에 수록)

작고한 동료 문인의 남은 가족이 비빔밥 전문점을 차렸다. 특별난 음식 솜씨도, 남다른 장사수완도 없이 오로지 생활에 떠밀려 궁여지책으로 차린 가게라서일까. 입맛이 영 쓰다. [사진 pixabay]

작고한 동료 문인의 남은 가족이 비빔밥 전문점을 차렸다. 특별난 음식 솜씨도, 남다른 장사수완도 없이 오로지 생활에 떠밀려 궁여지책으로 차린 가게라서일까. 입맛이 영 쓰다. [사진 pixabay]

시는 총 세 개의 장면을 그린다. 첫 번째는 작고한 동료 문인의 남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인 ‘형수’가 비빔밥 전문점을 차렸다. 개업이야 축하해 마땅한 일인데, 그 소식을 들은 시인의 입맛이 영 쓰다. 특별난 음식 솜씨도, 남다른 장사수완도 없이 오로지 생활에 떠밀려 궁여지책으로 차린 가게라서일 것이다. ‘비빔밥 전문점, 그간의 사정을 알고도 남겠다’에서 그런 배경을 짐작해본다.

두 번째는 시인 본인과 아내의 이야기다. 아내가 끼고 있는 반지, 사실은 시인이 선물한 게 아니다. 그럼에도 ‘이이가 선물한 것’이라는 아내의 자랑에 슬픔이 밀려온다. 넉넉하게 잘살고 있다며 친정엄마 안심시키고 싶지 않은 딸이 어디 있겠는가. 그 안심 때문에 아내는 자존심을 버리고 거짓말을 한다. 그 마음을 훤히 아는 시인의 마음은 무겁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에서도 조심한다. ‘육수처럼 끓었다’고 쓰되, ‘무엇’이 끓었는지 쓰지 않는다. 주어의 자리를 빈칸으로 둔다. 그 빈칸에 공감하고 마는 것이 시를 읽는 독자일 것이다.

세 번째가 진짜다(이 시의 구조는 전형적인 ‘훅-훅-잽’이다). 주인공은 시인에게서 한글을 배우는 결혼이주여성이다. 이 양반도 개업했다. ‘꽃집’이라는 흔한 말 대신 교재에서나 쓸 법한 ‘화원’이라는 말을 쓰는 모습에서 이방인이라는 말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 뒤에, 곧바로 한방 얻어맞는다. ‘개업인데, 전화할 곳이 선생님밖에 없어서……’ 아, 꼭 꺼이꺼이 통곡할 일만 슬픔이더냐. 기쁜 일이 생겼을 때 전화할 곳이 없는 것, 그런 슬픔들을 우리는 일상에서 참 많이 맞닥뜨리지 않더냐. 시인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무까리 씨의 이런 외로운 처지를, 시인은 ‘소쩍새가 섧게 울었다’라는 말로 대신 보듬는다.

‘전화할 곳이 선생님밖에 없어서’라는 시의 한 방은 앞서 소개한 젊은 시인들의 것에 비해서는 훨씬 투박하다. 하지만 꾸며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생활에서 터져 나온 진짜 시다. 이런 문장에 ‘한 방’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건 경박해 보인다. 이건 그냥 ‘방’ 같다. 시를 통해 ‘형수’라는 사람의, 시인 본인의, 그리고 무까리 씨의 방에 다녀온 느낌이다. 시인이 나를 그들의 방으로 데려간 셈이다. 방에서 나오면서 필자, ‘다음에 올 땐 뭐 사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뭐가 좋을지, 유용주의 시집을 마저 읽으며 생각해 볼 일이다.

회사원·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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