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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이병호 "내가 朴에 뇌물 주겠냐" 특활비 뇌물선고 반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청와대에 상납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이병호 전 국정원장이 지난 6월 14일 오전 구속 기간 만료로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뉴스1]

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청와대에 상납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이병호 전 국정원장이 지난 6월 14일 오전 구속 기간 만료로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뉴스1]

"다시 들어가야겠네요…제가 어떻게 대통령에게 뇌물을 줄 사람입니까"

대법, 이병호 전 국정원장 특활비 2억원 뇌물 인정 #이 전 국정원장 "말도 안되는 판결, 없는 죄를 만들어" #변호인 "뇌물 고의 없어, 파기환송심서 다툴 것"

이병호(79) 전 국정원장이 28일 대법원 선고 결과를 들은 뒤 그의 변호인에게 쏟아낸 말이다. 이 전 원장은 "정말 말도 안되는 판결이다. 없는 죄를 만든 법 기술자들에 분노한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병호 반발, 왜   

대법원은 이날 이 전 원장의 원심을 파기환송하며 그가 2016년 9월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전달한 국정원 특별활동비(특활비) 2억원을 뇌물이라 인정했다. "대가성과 현안, 뇌물의 고의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한 1·2심의 결론을 뒤집은 것이다.

이날 대법원은 박 전 대통령 재임기간 상납받은 35억원의 특활비 중 이 전 원장이 2016년 9월 전달한 2억원의 특활비만 뇌물이라 판단했다. 나머지 33억원은 박 전 대통령이 전직 국정원장과 공모한 '국고손실액'이라 봤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2년 5개월째 구속 수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9월 16일 어깨 부위 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성모병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국정농단 사건으로 2년 5개월째 구속 수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9월 16일 어깨 부위 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성모병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대법원은 2016년 8월 국정농단 의혹이 터진 뒤 박 전 대통령이 국정원에 '상납 중단' 지시를 내렸음에도 이 전 원장이 한달 뒤 자발적으로 2억원을 상납한 사실에 주목했다. 이 돈은 매달 정기적·수동적으로 전직 국정원장이 대통령에게 상납했던 특활비 33억원과는 다른 성격의 돈이라 본 것이다.

"뇌물 고의 없었다" 

하지만 이런 대법원의 판단에 이 전 원장은 "당시 박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제공한다는 고의가 전혀 없었다"고 반발했다.

그의 변호인인 엄상익 변호사는 "청와대 비서진과 이헌수 전 국정원 기조실장이 추석을 앞두고 대통령에게 돈을 올렸으면 한다는 제안에 이 원장이 관행대로 한 것"이라며 "박 전 대통령도 상납을 거부하지 않았다"고 했다.

엄 변호사는 "절망스러운 판결"이라며 "최근 대법원이 특정 성향을 갖고 하급심보다 훨씬 더 경직된 판단을 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 전 원장은 선고 뒤 “손자와 손녀는 법조인을 시키지 않을 것이다. 없는 죄도 만드는 사람들 이 아니냐"며 검찰과 법원을 비판했다고도 한다.

이병호 전 국정원장의 변호인인 엄상익 변호사의 변론기 '국정원장의 눈물'

이병호 전 국정원장의 변호인인 엄상익 변호사의 변론기 '국정원장의 눈물'

이병호 형량 늘듯  

엄 변호사는 뇌물죄와 함께 하급심과 달리 국정원장을 회계직원이라 판단한 대법원의 결정도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파기환송심에서 다퉈볼 계획"이라 말했다.

대법원이 이 전 원장의 뇌물공여를 인정한 이상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던 이 전 원장의 형량은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전 원장은 지난 6월 대법원 선고 전 구속기간 만료로 석방된 상태다.

엄 변호사는 지난 7월『국정원장의 눈물: 老人과 女王』이란 이 전 원장 변론기를 펴내기도 했다.

책에 따르면 이 전 원장은 지난해 8월 감옥에 있던 당시 엄 변호사에게 "나 자신이 이미 거미줄에 걸린 채 살려고 몸부림치는 벌레 같다는 생각이 든다"며 "억울함 때문에 신경안정제를 먹지 않고는 잘 수 없다"는 답답함을 토로했다.

2018년 11월 '특활비 상납' 항소심 선고 출석하는 이병기·남재준·이병호 전 국정원장의 모습.[연합뉴스]

2018년 11월 '특활비 상납' 항소심 선고 출석하는 이병기·남재준·이병호 전 국정원장의 모습.[연합뉴스]

거미줄에 매달린 벌레 

엄 변호사는 이 전 원장이 철창 밖으로 '내가 언제 돈을 횡령했느냐'고 소리치고 '내가 언제 정치에 관여했느냐'면서 허공에다 주먹질을 한 일화도 전했다.

이 전 원장은 자신의 상관이던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워낙 자폐적인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 이 좁은 감방에서 혼자 버텨낼 수 있는지도 몰라요. 국정원장을 3년 동안 했지만 나도 몇 번 보지 못했어요"라는 말도 했다고 썼다.

엄 변호사는 대법원 선고에는 강력히 반발했지만 자신의 변론기엔 국정원의 특활비 상납에 비판적 입장을 밝혔다.

엄 변호사는 "법원의 결정으로 정치권력이 더 이상 국정원에 숨겨진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됐다"며 "이 전 원장이 대신 떠안은 세상의 죄를 세밀하게 보았다. 시대 정신이 이런 적폐에 대해 철퇴를 내린 것"이라 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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