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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국민음료'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사라진 이유는?

중앙일보

입력

80,90년대 중국 전역을 휩쓴 인기 음료가 있었다. 이 음료는 '동양의 마법음료'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스포츠 음료로 유명한 젠리바오(健力宝)다. 당시에도 콜라 같은 탄산음료가 있었지만, 누가 뭐래도 젠리바오는 당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국민음료였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기억한다. 당시 잘나가던 젠리바오가 한순간에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더라.. 무슨 사연이였을까?

[출처 바이자하오]

[출처 바이자하오]

잘나가던 젠리바오, 물거품처럼 사라진 이유

젠리바오의 설립자 리징웨이(李经纬)는 1939년 광둥성 포산시(佛山市) 산수이현(三水县) 출생이다. 그는 36세, 스포츠음료에 대한 상업적인 가치에 대해 고안하고 연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 스포츠 음료는 1984년에 개발됐고, 리징웨이는 그 이름을 "젠리바오"라고 짓게 된다.

젠리바오의 성공에는 리징웨이의 3가지 전략이 통했다.

우선, 그는 젠리바오를 "캔음료"로 포장했다. 당시로선 전례없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이는 곧 당시의 프리미엄 음료의 상징이 되었다.

[출처 바이자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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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스포츠 경기 후원으로 전세계에 전파를 탔다. 1984년 젠리바오는 LA 올림픽의 중국 선수단을 후원했다. 당시 중국 여자배구 선수들이 주최국인 미국을 격파하면서 삼관왕 타이틀을 거머졌고 선수들이 젠리바오를 마시는 장면에 포착되며 젠리바오는 단숨에 유명해졌다.

이를 계기로 매출이 300만 위안에서 1600만 위안까지 치솟았다. 이어 1990년에는 아시안게임을 후원했고 8억 위안의 매출을 달성하기도 했다.1996년에는 연 매출액이 60억 위안에 근접하는 기록을 세웠다. 당시 업계 2위였던 와하하(娃哈哈) 매출액의 2배가 뛰어넘는 액수였다.

셋째, 리징웨이는 음료수 병뚜껑 이벤트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매년 100만여위안을 상금으로 걸었고 반응은 화끈했다. 그가 내놓은 사업모델이 모두 신의 한 수 처럼 시장에 족족 들어먹혔다.

몇 년 동안 젠리바오는 중국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음료 강자 자리를 누렸다. 1994넌 젠리바오는 500만 달러를 투자해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한층 전체를 매입했다. 당시 매출이 18억 달러를 넘긴 상황이었다.

리징웨이는 당시 뉴욕 사무실을 열고 취재하던 미국 기자에게 "코카콜라와 펩시의 중국 판매량을 모두 합해도 젠리바오에 미치지 못한다"며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정치적 타협없이 돌파하려 했던 중국 기업가의 결말은?

[출처 소후닷컴]

[출처 소후닷컴]

글로벌을 향해 방향을 잡은 리징웨이는 1996년 10억 위안을 들여 광저우에 젠리바오의 신사옥을 짓는다. 하지만 이게 곧 젠리바오 운명을 가를지는 아무도 몰랐다. 산수이 정부는 젠리바오의 본사 이전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각종 우대 혜택을 제시하며 산수이에 남아주길 바랬다. 하지만 리징웨이가 거절하면서, 산수이 정부 역시 광저우 신사옥의 비준을 불허하며 양측 모두 날을 세우기 시작한다.

[출처 바이자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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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징웨이는 광저우의 신사옥으로 글로벌 도약을 꿈꿨으나 산수이 정부는 정부의 돈줄인 젠리바오를 빼돌리는 것으로 의심했다. 그러면서 젠리바오의 정부 개입은 더 심해졌다. 새로운 음료 개발, 예산 집행 모두 정부가 직접 승인해야했다.

1997년 젠리바오의 매출액은 50억 위안을 넘었는데,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젠리바오가 나날이 성장세를 타면서 리징웨이는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1997년 젠리바오를 홍콩거래소에 상장시키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이 역시 산수이 정부가 거절한다. 홍콩 임시거주증이 없으므로 H주 증시를 구매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리징웨이와 정부간 소유권 갈등을 깊어지면서 결국 산수이 정부는 2001년 젠리바오를 매각하기로 결정한다.

2002년 리젠바오는 다른 주인에게 넘어갔다.  산수이 지방정부는 4억 5000만 위안을 써낸 리징웨이를 내치고, 3억3800만 위안을 써낸 저장궈투(浙江国投)의 장하이(张海)에게 팔아넘겼다. 이로 인해 큰 충격을 받은 리징웨이는 9일 뒤 뇌출혈을 일으켰다.

[출처 소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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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이가 젠리바오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장하오는 사업가로서는 문외한에 속했고, 젠리바오 역시 빛을 보지 못했다. 심지어 장하이는 2005년 젠리바오의 7억 위안을 횡령한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성공한 기업가에서 범죄자로 

2002년 리징웨이가 뇌졸중 앓은 이후 2009년 부패혐의로 고발당하는 운명을 맞는다. 그의 병세가 심각해 법원이 재판을 잠정 중단하는 결정을 내렸고, 2011년 이 사건의 재공판이 진행되면서 징역 15년에 벌금 15만 위안이 선고된다. 이렇게 리징웨이는 중국의 '성공한 기업가'에서 '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2013년 4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출처 소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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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세상을 떠난 후, <남방도시보(南方都市报)>에서는 젠리바오 사건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젠리바오는 성공 사업가이지만, 지혜가 부족했다. 산수이 정부의 선택은 옳았지만, 그들은 전도 유망한 기업을 망쳐놨다. 주인이 바뀌고 사기꾼들이 들끓을때 이미 젠리바오가 붕괴는 시간문제였다. 잘나가던 기업이 비극적이 결말로 끝이 났지만 진짜 범인은 누구인지도 모른다.

젠리바오의 몰락은 중국 정경관계 사이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비극적인 사건으로 꼽히고 있다.

리징웨이는 한 때 중국 기업가의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중국 정부와 기업가 사이의 완력 조절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면서 '성공 스토리'가 아닌 최악의 비극을 맞이했다. 국민음료 젠리바오는 주인이 5번이나 바뀌면서 예전의 명성을 되찾는데 실패했다.

차이나랩 이은령

[출처 네이버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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