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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김세연 의원과 자유한국당’ 에피소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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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자유한국당은 이제 수명을 다했습니다. 이 당으로는 대선 승리는커녕, 총선 승리도 이뤄낼 수 없습니다. 무너지는 나라를 지켜낼 수 없습니다. 존재 자체가 역사의 민폐입니다. 생명력을 잃은 좀비 같은 존재라고 손가락질받습니다. 창조를 위해서는 먼저 파괴가 필요합니다. 깨끗하게 해체해야 합니다.” 김세연 의원의 21대 국회 불출마 선언문 내용이다.

심하거나 과도하지 않았던 #김의원의 ‘창조적 파괴’ 선언 #자유한국당 쇄신을 위해선 #참여와 사회적 가치 품어야

한국당의 최연소 3선 개혁파 기대주이자 당의 싱크탱크 여의도연구원장인 김 의원의 충격적인 선언을 두고 반응은 둘로 나뉜다. 우선 표현이 너무 심하고 과도하다, 왜 먹던 우물에 침을 뱉느냐, 배은망덕하다, 내부 총질이다, 당 해체가 창조적 파괴가 아니라 보수 세력의 소멸과 좌파의 득세로 이어질 것이라는 비판과 반발의 소리가 들린다. ‘낡은 집을 허물고 새집을 짓자’라는 유승민 의원 및 변혁(바른미래당 변화와 혁신을 위한 비상행동) 측과 관계가 있는 것 아니냐, 심지어 다음번 부산시장을 노리고 있다는 등 음모론적 해석도 제기된다.

반면 김 의원 지적이 틀린 게 없다는 반응이 나온다. 조금 의외였지만, 불출마 선언 바로 다음 날 나온 한 신문의 사설, “‘좀비 한국당’ ‘존재가 민폐’ ‘다 물러나자’ 틀린 말 없다”가 대표적이다. “한국당에 대한 비호감도가 북한 김정은과 같은 62%라는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도 있었다. 국민의 지지를 존재 이유로 하는 정당으로선 사망 선고를 받은 것과 같다. 사망 선고를 받았는데 계속 돌아다니며 먹잇감을 탐하는 게 바로 ‘좀비’다”라고 풀이한다. 현 상태로 한국당은 가망이 없으며 물갈이 수준을 넘어 사즉생의 혁신이 있어야만 한다는 얘기다.

이번 김 의원 불출마 선언과 반응을 보면서 필자가 여의도연구원 회의에 참석해 경험한 에피소드가 떠올라 이를 공유하고자 한다. 청년의 정치참여를 주제로 열린 회의로 한국당을 ‘모든 청년이 와서 뛰놀 수 있는 일종의 플랫폼 정당’으로 만들고 싶다는 김 원장의 발언이 인상적이었다. 워낙 그가 청년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개방형 플랫폼 정당 얘기를 꺼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였다. 필자 또한, 한국당이 청년과 공감하고 소통하며 이들의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기존 보수의 대의제와 시장적 가치를 넘어 새 시대가 지향하는 참여와 거버넌스(協治) 및 사회적 가치를 품을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의 토론을 했다.

영국 보수당의 젊은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 총리가 주창했던 큰 사회(Big Society) 정책을 예로 들어, 전향적으로 시민사회의 참여와 파트너십, 그리고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쪽으로 고민해보길 권했다. 이는 진보만의 의제가 아니며, 기업도 주주 중심의 이윤추구를 넘어 이해당사자들의 참여와 사회통합, 환경보호 등 제반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변화는 소위 현명한 이기심(enlightened self-interest)에 기초한 합리적 선택으로, 마치 기업이 이윤뿐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평판이 올라가고 더 많은 제품을 팔 수 있으며 더 유능한 젊은이들을 직원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것처럼, 한국당도 중도로 지평을 넓혀 더 많은 유권자의 표를 얻을 수 있고 탈물질주의적(post-material) 청년세대의 관심과 참여를 끌어내 수 있다고 설득하였다. 함께한 다른 토론자들도 대체로 동의했고, 김 원장도 과거 사회적경제 관련 입법에 앞장섰다는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기도 했다.

매끄럽게 진행되던 회의의 흐름을 끊듯, 청중석에 앉아 듣고 있던 한 4선 의원의 논평이 들렸다. 요컨대 당에서 김 의원을 원장으로 앉힌 건 새로운 연구나 실험을 하라는 것이 아니며, 무엇보다 다음번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을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톤은 높지 않았지만, 분명 불만스러운 투였으며 당시 다소 당황한 듯 총선 승리가 물론 중요하다고 서둘러 답하던 신임 원장의 모습이 기억난다. 새로운 연구원장이 참신하게 기획한 첫 회의 자리가 실망스럽게 끝나버리는 안티클라이맥스의 장면처럼 씁쓸하게 느껴졌다. 회의 후 ‘당에 면역력이 생기려면 실험을 조금씩 천천히 해야 할 듯하네요’라고 스치듯 필자에게 던진 김 원장의 발언도 기억난다.

이후 얼마 안 지나 친박이 장악한 당 지도부가 유일한 비박계 당직자인 김 원장을 교체하려 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특히 여의도연구원이 내년 총선에서 공천의 기준이 되는 여론조사를 담당한다는 점에서 친박이 공천을 좌지우지하기 위해 그를 교체하려 했다는 의심이 일각에서 제기되었다. 그리고 최근 그의 불출마 선언이 나오게 된다.

김 의원의 선언에 대한 반응은 분분하다. 하지만 “비호감 정도가 변함없이 역대급 1위입니다. 감수성이 없습니다. 공감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소통능력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하는 걸 모르거나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세상 바뀐 걸 모르고,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한국당의 현실에 대한 그의 진단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