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처음 햇빛 본 1500년 전 가야 무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28일 경남 창녕군 교동 가야고분 발굴현장에서 크레인을 이용해 63호분 뚜껑돌을 들어올리고 있다. [연합뉴스]

28일 경남 창녕군 교동 가야고분 발굴현장에서 크레인을 이용해 63호분 뚜껑돌을 들어올리고 있다. [연합뉴스]

크레인이 크고 넓은 화강암 뚜껑 돌을 들어 올리자 촘촘하게 돌로 쌓아 올린 직사각형 석실이 드러났다. 1500년 만에 처음으로 빛을 쬔 잿빛과 갈색 토기들이 흙먼지 속에서 기지개를 켜는 듯했다. 무덤 주인과 함께 묻혀 있던 이 부장품들은 무덤을 둘러싼 수수께끼를 풀어줄 일종의 ‘타임캡슐’이다. 5세기 중후반 경남 창녕군 목마산 중턱에 조성된 이래 단 한 번도 손을 타지 않은 교동·송현동 63호분의 내부가 이렇게 세상에 공개됐다.

경남 창녕 63호분 내부 첫 공개 #도굴꾼 손길 피한 “0.1%” 사례 #‘비화가야’ 최고위층 묻힌 듯 #굽달린 토기, 철제 농기구도 나와

28일 문화재청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이하 연구소)가 1500년 전 비화가야 지배층 무덤군 250기 가운데 도굴되지 않은 채 처음으로 발굴된 63호분을 원형 상태로 공개했다. 연구소는 지난 2016년부터 고분군 가운데 세 번째로 큰 39호분(지름 27.5m)을 조사해 왔다. 이 과정에서 아래쪽에 조성된 별도의 63호분(지름 21m)을 찾아냈다. 나중에 축조된 39호분에 가려져 도굴 피해를 보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장 설명을 맡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정인태 연구사는 “가야 고분 특성상 도굴꾼의 손을 타지 않고 이렇게 온전히 발굴될 확률은 0.1%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한번도 도굴되지 않은 채 이곳에서 발굴 된 가야고분 63호분 내부. 비화가야 최고위층 무덤으로 추정된다. [사진 문화재청]

한번도 도굴되지 않은 채 이곳에서 발굴 된 가야고분 63호분 내부. 비화가야 최고위층 무덤으로 추정된다. [사진 문화재청]

이날 현장에선 63호분 석실을 덮고 있던 뚜껑 돌 7개 중 2개를 들어 올리는 작업이 이뤄졌다. 각각 무게가 2.8t, 3.8t이다. 이 돌은 길이 2.5~3m, 너비 1m, 두께 최대 80cm로 거대하다. 정 연구사는 “이 화강암은 인근 화왕산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운반하고 무덤 위에 덮었는지는 미스터리”라고 말했다. 두 번째 돌 아랫부분에 붉은색 주칠이 선명했다. 귀신을 쫓기 위해 칠한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 따랐다.

뚜껑 돌 아래 자리한 석실은 가로 1.9m, 세로 6.4m 크기의 직사각형이다. 내부는 남쪽부터 차례로 토기, 매장자, 토기, 순장자, 토기를 묻어 공간을 구분했다. 토기는 창녕 토기 특성이라 할 굽다리 접시와 점열 무늬,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색이 확연했다. 살포(농기구의 일종) 등 철기도 찌그러지고 녹슨 채 일부 남아 있었다. 이들 부장품과 흙을 걷어내야 아래 인골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정밀한 유물 조사와 수습에 두달 이상 걸릴 전망이다.

인근 62호분에서 나온 비화가야 토기. 강혜란 기자

인근 62호분에서 나온 비화가야 토기. 강혜란 기자

금관가야·대가야 등과 함께 세력을 형성했던 비화가야는 훗날 신라에 흡수 병합되면서 남은 기록이 사실상 없다. 고고학적 발굴이 그만큼 중요하다. 문제는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 고분 조사가 시작된 이래 도굴이 극심했다는 점이다. 도굴꾼은 봉분을 파 들어간 뒤 뚜껑 돌과 측벽 사이 틈새를 이용해 석실로 들어가 유물을 털어갔다. 실제로 63호분 위에 자리한 39호분은 이런 식으로 털려 내부에 유물 대신 도굴꾼이 남기고 간 흙투성이 고무 대야 등만 남아 있었다.

63호분과 대조적인 39호분의 내부도 관심을 끌었다. 약 1.5m 길이의 큰 돌(판석)을 세우거나(양 장벽과 남단벽), 눕혀서(북단벽) 매장주체부의 네 벽을 만들었다. 이런 구조는 성주 성산동 고분군 등 대구·경북지역과 일본 나가노의 키타혼죠(北本城) 고분 등 나가노, 후쿠오카 지역에서 확인된다. 당시 비화가야와 주변국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다.

창녕군 가야사복원 TF팀 김주란 학예연구사는 “가야 고분 조사는 1980년대 일본의 터무니없는 임나일본부설에 맞서 본격화됐고 현재까지 발굴 성과만으로도 독자적인 사회·문화가 충분히 입증된다”면서 “이번에 온전한 형태의 무덤이 발굴됨으로써 좀 더 정교한 장송의례와 고분 축조기술 등을 파헤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창녕=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